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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시작된 '희망의 인문학 - 정재승이 만난 사람들‘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마지막 인문학자는 성공회대 교수였다

지난 11월 23일 이화여대 언어교육관에서 열린 ‘정재승, 신영복 교수 특별대담 -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현장. 3백여 명의 관객이 자리를 메웠다. 매서운 추위가 닥친 저녁이었지만,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스승’을 기다렸다. 신영복 교수가 등장하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혼란과 좌절의 시기를 건너고 있는 젊은이들은 진지하게 듣고, 물었다. 스승의 답은 따스했다. 강의 말미,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슴에 ‘숲으로 가는 길’을 새긴 듯했다. 이날 대담은 페이스북으로 생중계 되었다. 사회는 유정아 아나운서가 맡았다.

유정아 : 안녕하세요. 사회를 맡은 아나운서 유정아입니다. ‘희망의 인문학 -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라는 주제로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가 10분의 인문학자를 만나셨는데요. 인류학자 조한혜정 교수, 강신주 철학박사, 건축가 황두진, 사회학자 송호근, 물리학자 장회익, 그리고 10번째로 신영복 교수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큰 자리다 보니 저는 도우미로 초대를 받았네요.

먼저 정재승 교수님을 소개해드릴께요. 책 『과학콘서트』로 큰 열풍을 몰고 오셨죠. 과학서적의 이전, 이후를 나눴다는 평을 받았는데요. 어려운 과학이라는 주제를 쉽고 재미있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애매하고,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막무가내식 주장이 만연하는 가운데 제대로 된 정보를 던져 준 과학자이기에 젊은이들의 멘토로 자리잡으신 게 아닌가 합니다. 정재승 교수 뜨거운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정재승 : 안녕하세요. 정재승입니다. 반갑습니다. ‘정재승이 만난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10번째 인터뷰까지 왔습니다. 오늘은 정말 각별한 시간이 될텐데요. 바로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간단하게 약력을 소개해드리고 모시겠습니다. 1941년 밀양에서 태어나셨고요.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시던 중 통일혁명단 사건으로 구속되셔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으셨습니다. 20년간 의 수감생활을 거치셨고 1988년 특별가석방 되신 후, 성공회대에서 사회과학부 교수로 계셨죠. 2006년 정년퇴임 하셨습니다. 지금은 석좌교수로 계십니다. 선생님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나눔과 소통의 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신 우리시대의 스승 신영복 교수님 모시겠습니다.

신영복 : 반갑습니다. 오늘 두 분 양쪽에 계셔서 믿음직합니다. (웃음) 경험이 많은 분들이 계셔서, 제가 조리 없어도 잘 잡아주시리라 믿습니다. 또 어느 정도 준비된 청중들이실 것 같아요.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정재승 : 젊은이들과 만날 기회가 많으시죠.
신영복 : 네, 자주 만나려고 해요.

정재승 : 젊음을 통째로 감옥에서 보내셨잖아요. 어느 곳에 ‘청춘은 감옥이었다’고 쓰기도 하셨는데요. 요즘 젊은이들 보시면 어떠세요.
신영복 : 지금 청년들도 감옥에 있는 것 같아요. 청년실업이나 지금 시대에 겪는 고통, 보이지 않는 감옥 같은 생활이죠. 그런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해서 오늘 나를 부르신 게 아닌가 해요.

청년시절 20년의 감옥생활, 인간에 대한 이해의 기간

정재승 : 그간 인문학분야 10분의 석학을 만나왔습니다. 지금 인문학은 어디에 와있고 나아갈 방향은 무엇이며,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를 알아봤는데요. 어떻게 살아오셨고,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지, 편안하고 솔직하게 답해주시면 됩니다.
신영복 : 오늘 주제가 ‘희망의 인문학’이죠. 우리시대 고민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를 봐야 할텐데요.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공부가 아닌가 해요. 청년시절을 감옥에서 보냈는데, 20대 후반부터 40대 후반까지요. 가장 중요한 시기를 감옥에 있던 셈이죠. 감옥에서 느꼈던 인간에 대한 이해, 그것이 우리가 천착해 있는 인문학적 내용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재승 : 선생님의 삶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통일혁명당을 조명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떤 사건이었고, 왜 감옥에 가게 되셨나요.
신영복 : 제가 59학번이에요. (웃음) 몇 년 전에 서울대 가서 09학번 학생들과 만났어요. 59와 09의 만남이었죠. 50년의 세월차가 있더라고요. 물어보신 사건, 참 오래됐네요. 그때 상황을 여러분은 잘 모르실거에요. 대학 2학년 때 4.19가 있었고요. 3학년 때 5.16 군사혁명 이후로 학생들의 저항과 반대 분위기가 형성되었어요. 제가 학생서클 운동의 1세대입니다. 사실, 당시엔 통일혁명당이란 게 없었어요, 감옥에 들어간 후에 만들어졌다는 걸 들었죠. 아무튼 감옥에 가게 되고, 무기징역까지 받을 줄 전혀 몰랐죠. 중앙정보부에서 취조할 때도 자기들끼리 얘기 하더라고요 ‘3년, 5년일꺼야’ 라고요. 그런데 사형구형이라고 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저는 군사재판을 받았습니다. 현역으로 육군중위였기 때문이죠. 68년 김신조 사태가 일어났고,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나포(拿捕)되어 북한에 억류되기도 했죠. 또 삼선개헌, 한일회담, 독도문제가 거론되며 복잡한 상황이었죠. 정확하진 않지만, 당시 서울대 학생서클 간부 하나를 사형을 시켜야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해요.

정재승 : 아, 그러니까 통일혁명당이 존재하진 않았지만, 주요 간부라는 누명을 쓰신거네요.
신영복 : 사실, 문리대 정치과 선배 한 분이 관련이 있었어요. 북한에 다녀오고 간첩사건과 관련이 있었고요. 난 학생서클 1세대였고,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죠.

정재승 : 당시에 150여명의 간첩단 사건 같은 게 나왔죠.
신영복 : 네.

정재승 : 어떻게 보면 억울한 상황으로 감옥에 가고, 무기징역까지 선고 받으신거네요.
신영복 : 여러 가지 생각이 참 많았죠. 조금씩 자기 문제를 사회적 관점, 역사적 관점으로 보게도 되었어요. 그러고 보니 역사적 격동기에 감옥에서 인생을 보낸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더라고요. 나도 그 중 하나구나, 팔자구나 생각했죠.

유정아 :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것이 나의 일이 되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인생을 다시 극복하지 못하게도 만들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청춘을 보내며 자기성찰적인 글이 나왔는지요.
정재승 : 정말요. 그런데도 피부가 너무 뽀야세요. 동안의 비결은 뭔가요 (웃음)

신영복 : (웃음) 당시 150명이 구속됐어요. 선배 후배들이 다 들어갔지요. 나는 후배들을 많이 데리고 들어온 선배입장이었기 때문에 죄책감, 미안함으로 고통스러웠어요. 나 자신의 문제보다 그것이 훨씬 고통스러웠죠. 또, 조용히 혼자 있을 땐 ‘사형이라니. 너무 빨리 죽는구나’ 이런 쓸쓸한 마음이 들었어요. 할 것도 참 많았는데 말이죠. 막상 무기로 감형이 되고 나서는 암담하기도 했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용케 잘 걸어나왔죠.

1988년 첫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남기며 이 시대의 고전이 된 책


한 달에 한 번 쓸 수 있는 엽서, 정신의 해방구

정재승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대학생들이라면 한번쯤 읽었을텐데요. 가족들과 나눈 편지글입니다. 어떻게 그 글들을 쓰게 되셨는지요.
신영복 : 지금은 감옥이 많이 달라졌죠. 집필, 티비 시청도 되고요. 그때는 일체 집필도 허가되지 않고, 편지도 한 달에 한 번씩 엽서를 신청해서 쓸 수 있었어요. 교도관의 감시하에 썼고요. 생소한 감옥에 던져지니, 충격적인 생각들을 많이 했어요. 그 생각들을 어디다 좀 적었으면 했죠. 다 잊어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유일하게 기록이 허락되는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쓴거에요. 아마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런 사색적인 내용을 쓴 사람은 없었겠죠.

정재승 : 굉장히 사색적이고, 산문이긴 하지만 시적이기도 해요. 그런 편지들을 받은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신영복 : 아직 정신적으로 무너지진 않았구나 하는 위로를 받았겠죠.

정재승 : 전 반대였을 것 같아요. 아니 점점 이상해지고 있구나. 이런... (웃음)
유정아 : 내지는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 같아요.

신영복 : 개인적으로 한 달에 한 번 밖에 못쓰기 때문에 한 달 내내 이 내용을 이렇게 쓰자 머릿속으로 정리를 했어요.
유정아 : 월간지 기고문이네요.
신영복 : 교정까지 완벽하게 끝냅니다. 20대라 머리가 명석했죠. 지금은 『엽서』라는 영인본이 나와 있죠. 그걸 보고 사람들이 말해요. ‘어떻게 고친 데가 하나도 없냐’고요.
유정아 : 그 속에서 퇴고를 다 하신거네요.
신영복 : 그렇죠.

정재승 : 교도관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신영복 : 편지를 검열하는 건 보안과, 교무과에서 하는데 사실 조심스럽죠. 검열을 전제로 하니까요. 통과되지 않을 이야기는 안됐어요. 그렇게 했는데도, 보낸 편지가 없어진 게 상당했어요. 검열 과정에서 사라졌겠죠. 까다로운 검열관 때는 피해서 썼어요. 통과수위가 낮은 사람이 검열할 때 썼어요. 그랬는데도, 많은 독자들이 물어요. ‘국가보안법이나 통혁당 간부라는 사람의 서신에 비전투적인 글만 나오느냐’고요.

유정아 : 정재승 선생님은 어떤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으세요?
정재승 : 많은 분들이 꼽으시는 부분일거에요. 옆에 있는 동료들을 열덩어리로 느끼게 해 증오하게 만드는 여름에 대한 글이요. 생명, 계절의 변화에 주목하신 여러 부분 모두 인상적이었어요. 그 안에서 마치 득도하신 것 같았어요. 굉장한 분노와 억울함이 있었을텐데, 어떻게 밖에 있는 사람에게 평온함을 줄 정도로 사색의 심연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정말 신기했어요. 문장을 한 번 쭉 읽어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여러 번 읽고 상상을 해야 그려지는 책이었어요.
신영복 : 까다로운 자기검열을 하게 되어, 글 전달이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어요. 저는 글을 읽다보면, 행간에 묻어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거의 읽지 않습니다. 괴롭기도 해서요.

고리끼가 그랬듯이, 감옥생활은 나의 대학생활

정재승 : 책에 실린 에피소드 중, 감옥생활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장면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신영복 : 감옥 20년을 나의 대학생활이라고 하는데요. 고리끼가 쓴 『나의 대학』이라는 책이 있어요. 고리끼의 학력은 초등 3학년이 전부였죠. 볼가강의 뱃사공 일을 도왔는데요. 배의 주방장이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대요. 그게 책을 보게 된 시작이었죠. 그의 책 『나의 대학』은 해방 직후에 번역되었고, 대학 다닐 때 고서점을 다 뒤져 찾아냈어요. 볼가강 근처 노동자 합숙소에서 지낸 2~3년간의 시절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해요.

내가 보낸 20~30년도 그랬던 것 같아요. 갇혀 있는 세월이긴 했지만, 밖에 있었다면 절대로 만나지 못했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와 역사 그리고 인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정재승 : 그래서인지 관계와 소통에 주목하고 계신데요. 감옥 안과 밖의 관계, 소통은 어떻게 다른가요.
신영복 : 오늘의 주제가 ‘희망의 인문학’인데요. 근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입니다. 자기의 주체성을 완강히 지키며 상대를 타자화시키고, 자연까지 대상화합니다. 이걸 청산하고 뛰어넘는 게 탈근대죠. 우리 시대가 당면한 과제라는 생각에서 관계론을 이야기하곤 하는데요. 인간적 관계를 가장 밀도 높게 경험한 게 감옥이 아닌가 합니다. 뜨거운 여름에는 칼 잠을 잡니다. 옆으로 누워서요. 수용인원이 많으니까요.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돼요. 사실, 그 사람은 아무 죄가 없거든요. 인간적인 관계를 잘못 파악하는 경우도 참 많아요.

감방마다 버릇없는 친구가 있어요. ‘싸가지 없는’ 사람이 각 방마다 있어요. 그 사람 만기 기다리다 자기징역 다 간다는 말까지 있어요. ‘쟤 언제 나가지?’ 그러고 기다리는 거에요. 재미있는 건, 그 사람 나간 날은 참 행복한데 2~3일 지나면 또 그런 사람이 들어온다는 거죠.

유정아 : 자신의 복역기간을 짧게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일 수도 있네요.
신영복 : 그러니까 증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결함이 없진 않지만, 몇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겪으며 상황이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는구나라는 깨달음을 겪게 되었죠. 우리가 갖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잘못되는가 말이죠.

정재승 : 싸가지 없는 사람의 특징은 이기적인가요, 무례한가요.
신영복 : 그런 면도 없지 않죠. 한편 열악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 배려하면 자기가 너무 힘들어요. 1차적 반응은 배타적 자기존재성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해요.


감옥에서 자살하지 않은 건 햇빛과 가족, 친구들 때문

정재승 : 지금 생각해보면 20년을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건 정말 끔찍한데요. 그 기간의 감정 변화는 어땠나요. 낙담도 하다, 희망도 가졌을 수도 있고요.
신영복 : 교도소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보도가 안 되지만요. 재소자가 지켜야 할 준수사항이 30개 정도 있거든요. 제가 붓글씨를 잘 써서, 그걸 많이 썼어요. 제1항이 교도관의 지시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5~6번째에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항목이 있죠. 꽤 비중이 높은 준수사항입니다.

제가 무기징역 받고 추운 독방에 앉아 있을 때, 왜 자살하지 않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했었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거든요.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햇빛 때문에 안 죽었어요. 그때 있었던 방이 북서향인데, 2시간쯤 햇빛이 들어와요. 가장 햇빛이 클 때가 신문지 펼쳤을 때 정도구요. 햇빛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내일 햇빛을 기다리고 싶어 안 죽었어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비록 20년의 감옥이 삶 속에 있지만 결코 손해는 아니다. 태어나지 않은 것과 비교한다면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 다음에는 내가 자살하면 굉장히 슬퍼할 사람들이 있었어요. 부모, 형제, 친구... 자기의 존재라는 것이 배타적 존재성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해요. <어린왕자>를 보면 리비아사막에서 어느 비행사가 불시착하잖아요. 살아날 가망성이 없으니 모래톱을 파서 시체가 들어갈 무덤을 준비하며 조난당해서 죽는구나,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죠. 너만 죽는 건 아니야. 너의 소식을 기다리는 가족들도 조난자야. 이런 질문을 던지죠.

유정아 :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살진 못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게 큰 슬픔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신영복 : 맞습니다. 우리 삶이란 게, 존재성이란 그런 게 아닐까요. 저도 근대적 교육을 받았기에 사고방식도 근대적이었죠. 같은 무기수이면서도 다른 재소자를 일단 타자화했어요. 딱 거리를 두고 분석을 해요. 죄명, 형기, 출신, 학력 이런 걸요. 대상화하는 거죠. 겉으로는 친절하지만요. 나중에 알았지만, 5년간은 왕따였어요. 특별하게 따돌리진 않지만, 인간적인 관계를 만들지 못했던 시기였죠. 그 후 그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만 소개할게요. 마흔쯤 된 친구인데, 집도 절도 없어 접견(면회)도 오지 않습니다. 어느날 접견 호출을 받아 놀랍니다. 우리도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몰려가서 물으니 대꾸를 하지 않고 침울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놈이 왔대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 친구가 두세 살 때 누이동생과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살 길이 없어 삼촌댁에 맡기고 어머니가 돈 벌러 가셨다 못 돌아오고 재가(再嫁)를 합니다. 재가 한 집이 마침 두세 살 남매를 두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자기 자식을 못 키우고, 다른 아이들을 키운거죠. 그렇게 키운 애가 찾아 온 겁니다. 나중에 알고 나니 이 사람이 쓸쓸하다는 거죠. 찾아온 분이 하는 말이 “만약,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모시고 오지 않았다면 내가 그 속에 있고, 당신이 밖에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훌륭한 분이었죠.

대상을 객관화하는 존재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자 왕따 면해…

나도 그 사람과 같은 환경, 부모였다면 똑같은 죄명으로 앉아 있겠구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근대적 사고로 타자화 하던 시기에서 5년쯤 후에 다른 사람의 삶을 공감하게 되었고 그때 왕따를 면했던 것 같습니다. 참 많은 발전을 한 거죠. 흐뭇했죠.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인간관계가 되지 않았어요. 공감, 동정 모두 좋은 품성이지만,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요. 물질적 도움은 되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선 ‘내가 가여운 입장에 있구나’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죠. 어떤 면에선 잔인한 거죠. 그래서 동정하고 동정 받는 관계는 대칭적 관계가 되지 못해요.

근대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사회적 윤리, 똘레랑스가 그것이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똘레랑스라는 프랑스 중심의 근대적 사고가 도달한 문화가 그 정도인 것 같아요. 감옥에서 그걸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유정아 : 다른 사람과의 연대, 연민은 초보적인 감정에서 비롯되는 거잖아요. 공감이라는 건 불쌍하지 않고, 극악무도한 존재라도 ‘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었겠구나’라는 정도라면, 관용이라는 건 그 사람이 되어보고, 그 외에 어떤 게 한 단계 더 보태지는 건가요?
신영복 : 바로 그 부분, 나는 상당한 정도의 발전이라고 생각했죠. 근대적 사고의 공감이요. 머리에서 가슴까지 왔다고 한 그 표현인데요. 그 먼 여정을 감옥에서 겪은 겁니다. 책에도 썼지만, 대단히 충격적인 경험을 해요. 목공장에서 목공일을 배웠던 때인데, 목수가 주춧돌부터 그리고 지붕을 마지막에 그렸어요. 제가 충격을 받았어요. 보통사람이라면 지붕부터 그리지 않았을까요. 학교에서 책을 통해서 도달한 인식이 얼마나 관념적인가 알게 됐거든요. 일하는 사람은 집짓는 순서와 그리는 순서가 같더라고요. 만약, 그런 시기에 똘레랑스가 최고의 덕목이라면,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난 지붕부터. 우리 평화적으로 공존하자. 이게 똘레랑스죠. 타인을 역시, 밖에 세우는거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육필 원본을 영인한 『엽서』


공감과 애정에서 머물러서는 안되고, 관용으로 자기 변화 이어져야…

중요한 건 사유와 다양성을 공존이 아니라 내가 변화할 수 있는 대단히 반갑고 고마운 기회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노마드, 탈주와 유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걸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공감과 애정도 근대의 패러다임을 넘어서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다시, 가슴에서 발까지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는 ‘숲’으로 가야합니다. 오만한 이야기지만, 발까지 가려고 노력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정재승 : 나는 똘레랑스를 갖고 상대의 의견을 참을 마음이 있는데, 내 생각을 참아주지 않아 관용이 부족한 사람과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요.
신영복 : 어려운 문제죠. 탈근대라는 것이 근대사회가 도달한 공존, 똘레랑스를 넘은 탈주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똘레랑스와 공존도 이루지 못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정말 필요한 거죠. 논리적 사고마저도 부족하죠. 뭔가 변화하고 뛰어넘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적어도 제가 감옥에서 겪은 것처럼,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 사람만이 아닌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와 지금의 처지를 아울러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개를 떼서 받아들이는 게 분석한다는 거거든요. 감옥에서 10년 이상을 살면 만기자를 보내며 우리끼리 이야기해요. ‘한 번은 더 들어오지, 아마’ ‘1년 안에 들어와’ 제가 처음에 계속 틀렸어요. 그런데, 그게 반대로 되더라고요. 장기수 노인들은 짜게 평가하더라고요. 차이를 알게 된 게 저는 그 사람만 봤는데, 저보다 오래 있었던 분들은 나가서 어떤 상황에서 살아갈 건가를 아울러 봐요. 그래서 관계를 만든다는 건, 사람만이 아닌 살아갈 환경과 처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처음에 그런 몇 번의 경험을 하고 나선, 그 부분에 대해서 아주 절제를 했습니다.

관계 맺음, 그 사람만이 아니라 살아갈 환경과 처지까지 봐야…

대전교도소에만 15년을 있었어요. 참 많은 사람들이 만기 출소하는 걸 봤어요. 만기인사라는 걸해요. ‘신세 많이 졌습니다. 몸 건강히 계시다 나오시기 바랍니다.’ 판에 박힌 교도소 인사법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 같은 국가보안법 무기수는 ‘국가의 은총으로 사회에 나오세요’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들어와요. (웃음) 다시 출소해서, 또 같은 인사를 해요. 가장 많이 만기인사를 나눈 횟수가 무려 7번입니다. 나와 나이도 비슷해요. 나중엔 자기도 민망했던지 악수하면서 이런 말을 해요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처럼 새출발 하게’라는 인사를 안하세요. 생각해보니, 전 한 번도 그 말을 안했더라고요. 그 사람이 나가서 살아갈 상황을 대강은 알아요. 사람만 보지 않는 거죠. 집도 절도 없이, 그런 사람이 마음잡고 어떻게 살아요? 자리라도 잡아야 할텐데,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가면 잘해봐라.’ 그 이상을 못했어요. 인간관계란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그 사람의 장점에 대해서 고래가 춤출 정도로 칭찬이 필요해요. 학교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교육학과도 관계되는데요. 지금 교육은 모난 부분을 깎아서 원만하게 해요. 결함을 교정시키죠. 그러면 안 됩니다. 그걸 포용할 수 있는 더 큰 원을 만들어, 그 안에 모를 넣어야죠. 큰 품성을 만드는 게 진정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니까요. 그 사람의 처지를 아울러 생각하고, 장점은 고래가 춤출 정도로 칭찬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고 해도, 자기를 이해하는 것만큼은 못해요.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할께요. 변소를 다녀오며 한 밤에 문을 쾅 닫는 친구가 있었어요. 자전거 튜브를 가운데 끼워 꽉 닫히게 해놨는데도요. 시끄럽다고 아침마다 핀잔을 받았죠. 제가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데 왜 그래?’라고 물었더니, 답이 이래요. ‘제가 야간 주거침입을 하고 달아나다 축대위에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다리를 다쳤어요. 쪼그렸다 일어나면 완전히 마비가 돼요. 추운데 마비 풀릴 때까지 있을 수가 없어서, 늘 문을 놓치는거예요’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양해를 구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하는 말이 ‘어떻게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이해를 받고 사나요. 그냥 욕먹고 살아야죠.’ 그러는 거에요.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었죠.

춘풍추상(春風秋霜), 나에겐 엄격하게 다른 사람에겐 부드럽게

‘춘풍추상(春風秋霜)’이라는 말이 있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춘풍처럼 부드럽게 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고요. 대신 나를 생각할 때는 추상같이 엄격하게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반대로 하죠. 다른 사람에겐 엄격하고 자기는 춘풍처럼 대하잖아요. 그 사람은 자기처럼 없이 살고, 부족한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갖고 있었던 거죠. 제가 그런 걸 보며 굉장히 많은 걸 배웠어요. 관계를 가질 땐,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연이 있겠다는 태도를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정재승 : 마지막으로 감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만 여쭤보고, 질문을 받을께요. 선생님, 감옥에서 부르던 18번 노래가 있으셨다고요.
신영복 : 사실은 노래보다는 글을 썼어요. 같은 층 연구실 김창남 교수가 노찾사 창단 멤버였는데요. 노찾사 재기하며 책을 썼죠. 거기다 노래에 대한 얘기를 쓰래요. ‘노래가 없는 세월을 산 사람에게 무슨…’ 그랬는데 그래도 쓰래요. 생각해보니, 이런 이야기거리가 있어요. 만기 출소 전에 영치금이 좀 남아 건빵 한 봉지씩 나누는 조촐한 만기파티, 가난한 만기파티가 있어요. 건빵 한 봉지씩 나눠받으면 훈훈해져요. 누군가가 노래 하나씩 하자고 해요. 내 차례가 오면 한사코 안하죠. 어쩔 수 없이 20년간 부른 노래가 ‘시냇물’이에요. 여러분도 다 아시죠. ‘냇물아 흘러서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정재승 : 음이... 어떻게 되죠?(웃음)
신영복 : 음은 안 해도 돼요. 우리세대는 노래에 대한 생각이 달라요. 우리는 가사 중심의 서사양식에 충실하게 들었죠. 전달이 어려우면 곡을 붙이고 그래도 안 되면 춤을 추고요. 그런데 요즘 ‘나가수’ 보면 조금 이상해요. 그렇게까지 온 몸을 던져서 부를 필요가 있나, 오버하는 게 아닌가 해요. 그러다 지금은 동작 하나하나가 작품이구나. 이게 퓨전이구나 해요. 당시엔 ‘시냇물’ 부를 때 마다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부분만 되면 숙연해졌어요. 처한 상황이 그렇다보니, 와 닿는 부분이었나봐요.


우리 시대 청년들도 감옥 밖의 재소자

인문학적 얘기를 하나 더 할까요. 출소하자마자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했어요. 종강파티를 했는데, 또 노래를 부르라고 해, 아는 게 시냇물 밖에 없어서 하면, 아이들 표정이 ‘넓은 세상’에서 재소자와 비슷하게 되요. 그때, 이 사람들도 갇혀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미셸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그런 말을 했죠. “감옥이란 밖에 있는 사람이 갇히지 않았다는 착각을 하게 하는 정치적 공간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이죠. 우리 시대 청년들도 보이지 않는 감옥에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시냇물’은 참 인문학적 노래 같아요.

유정아 : 다 같이 시냇물을 부르면 어떨까요.
신영복 : 그래요.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박수) 같이 넓은 세상을 보기도 하고,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정재승 : 숙연해집니다.
유정아 : 정말 소리도 맑으시네요. 질문을 받겠습니다.

독자 1 : 만나 뵈어서 너무 반갑습니다. 감옥이나 귀향을 다녀오면 가장 큰 대학, 배움의 자리였다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0살 때부터 제 나이가 되는 마흔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모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어요. 저희는 어떻게 하면 그런 큰 배움의 자리를 만날 수 있을까요.

정재승 : 감옥과 같은 배움의 대학! 굉장히 와 닿는데요.
유정아 : 보통의 젊은이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공간 말이죠.

신영복 : 모두 깨닫죠. 저처럼 책을 쓰지 않을 뿐이겠지요. 감옥이 특별한 공간은 아닙니다. 밀집된 공간이기에 인간관계가 더 풍부할 뿐이겠지요. 도시는 싫은 사람은 만나지 않으면 되죠. 감옥은 싫은 사람도 계속 만나야 하죠.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서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6.3사태 때 제가 써줬던 원고가 압수되어 울산 해변가에 숨어 있었어요. 한 달간 너무 무료해서 바닷가에서 파도를 봤죠. 자갈들이 길게 펼쳐져있어요. 모두 동글동글 다듬어져있었죠. 오래 보고 있다, 다듬어지는 과정을 깨달았어요. 파도가 들었다 내려놓으면 서로 막 부딪혀요. 그걸 수천만 년 했겠죠. 서로 부딪히고, 마모되며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거죠.

저도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해요. 선생이 뭔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여러분끼리 부딪혀 절차탁마하는 게 필요하다. 저는 감옥에서 책도 읽고 했지만, 가장 깨달음에 도움이 된 게 있다면 사람들에 대한 이해였던 것 같아요. 농밀한 인간적 관계에서 얻은 게 많습니다. 제 친구 후배 중 한 사람이 결혼 6개월 만에 감옥에 들어왔어요. 신부 같은 처를 두고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그가 ‘이번 달엔 제 처가 몹시 아파 접견을 못 온대요.’ 그래서 제가 ‘편지를 받았나요?’ 했더니 ‘보내온 옷에 향수가 두 배 이상 짙게 뿌려져왔어요’ 해요. 아파서 접견가지 못하는 마음을 향수의 양의 증가로 표현했다고 해요.

감옥살이에서 가장 큰 힘든 건, 개인의 고통이 아니에요. 그건 다 견딜 수 있어요. 자기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의 고통이 자기 아픔으로 건너와요. 짐을 질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에요. 기쁨과 슬픔의 근원은 바로 ‘관계’에요. 책은 그저 관념적인 수준에 끝날 수 있어요. 적어도 가슴까지 내려오려면, 인간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 부딪힘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사람과의 관계… 머리에서 가슴, 더 나아가 발까지 가야

독자 2 : 성신여대 4학년 학생입니다. 똘레랑스에 대한 부분,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저도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걸 신념처럼 믿고 살아왔는데요. 최근 유럽에서 다문화주의로 인한 테러, 분쟁을 보며 너무 협소하게 생각한 게 아닌가 했어요. 절대 악 같은 게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혼란을 느꼈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영복 : 우리 시대에 없는 것들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겁니다. 함께 하는 공감과 가치의 결핍을 느끼실 겁니다. 저는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가 참 많다고 생각해요. 제가 감옥에서 함께 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슴에서 했던 공감을 기초로 해서, 자기 반성이 더해졌다는 의미에요. 그런 노력이 꼭 필요해요. 우리가 사는 서울만 해도,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인간관계를 이루지 못하죠. 숲의 공간을 만들지 못하고 있죠. 감옥 10년쯤 살고 나면 다른 사람을 잘 판단해요. 죄목과 형기를요. 다른 사람에 대한 민감한 감각을 출소 이후에 잘 사용하는 곳이 바로 지하철에서 자리잡을 때에요.

저는 지하철을 탈 때, 누가 어느 역에서 내릴 때 거의 알아맞춰요. (웃음) 앉으려고 마음먹으면 언제든 앉을 수 있어요. 어느 날은 인천에 특강이 있어 가는데 영등포역에서 1호선을 탔어요. 자리가 없었어요. 신도림에서 내릴 사람을 찾는데, 바로 앞 사람이 일어나요. 바로 앉으려는데, 젊은 여자분이 내 앞에 빈자리로 옮기더니 자기 앉아 있던 자리에 친구를 앉히는 거예요. (웃음)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죠. 누가 보더라도 그 자리에 대한 권리는 제게 있었는데 말이죠. 불법적으로 그 자리를 가져가더라고요.

현대인들, 깊은 만남 없으니 관계 맺지 못한다

제가 『강의』란 책을 썼습니다만. 맹자가 인자하기로 유명한 왕을 찾아가 이런 소문을 확인했다고 해요. 제사 지내려는 소를 불쌍하다 놔주라고 한 적이 있냐고요. 그때 왕이 이렇게 말해요. ‘양으로 바꿔 지내라’고 했다고. 맹자가 묻죠. ‘소가 불쌍해 보여서인가요? 그렇다면 양은요?’ 소와 양을 바꾼 이유를 맹자가 이야기해요. 소는 죽는 걸 봤고, 양은 못 봤다는 겁니다. 즉, 만남과 관계가 있다 없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전철에서 내 자리를 가로챈 사람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죠. 본 적도 없고 볼 일도 없는 사람이죠. 대부분 서울시민들이 그런 관계로 살고 있어요.

지하철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평균 탑승시간이 20분, 10정거장이에요. 그러니 자리를 불법점유를 하는 거죠. 3년간 함께 밥해먹고, 같이 산다면 그럴 수 없었겠죠. 그래서 관계가 중요한 거에요.

모스크바에서 비싼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거기 지하철이 유명하죠. 지하 150미터. 노인이 탑승하면 젊은이들이 모시고 자리에 앉혀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이렇게 말을 해요. ‘저 노인들이 청춘의 혁명적 정열을 바쳐 건설한 전철이니 당연히 양보해야죠!’ 우리 학생들에게 비슷하게 물어봤죠. ‘너희들이 타는 지하철, 지금 노인들이 젊어서 만든 건데 왜 양보를 하지 않니?’ 그랬더니 학생들이 칼 같이 대답해요. ‘노인들이 만든 건 맞지만, 봉급 받으려고 한 거지 우리와 무슨 상관이에요?’ 똑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볼 수 있죠.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 실상이기도 하죠.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공동체, 인간적 관계를 만들어가겠어요. 대단히 어렵죠. 그래서 제가 ‘작은 숲’을 만들자고 제안을 하는 겁니다. 바로 여기도 작은 숲일 수 있죠. 오신 분들이 비슷한 고민을 갖고 계실테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고, 작은 약속을 했으면 좋겠어요. 꼭 물리적 공간이 아닐 수도 있고요. 작은 숲과 숲이 소통하는, 의식적인 노력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걸 통해 우리 사회의 인식과 문화도 탈근대적인 것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관용으로 지속가능한 ‘숲’의 공간 만들자

정재승 : 저도 지금 질문한 학생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얼마 전 노르웨이에서 극우단체 한 사람이 다문화행사에서 어린이들을 무차별로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총을 겨누는 그런 사람들에게 우린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런 문제를 고민하게 되거든요. 결국 노르웨이 정부는 그 사건을 보듬고 더 큰 관용으로 보복하겠다고 했지요.
신영복 : 크게는 똘레랑스의 과정을 거쳐 공동체적인, 지속가능한 숲의 공간을 만들자는 게 합의되겠지만 그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선택적 정책 방향도 필요하겠죠. 한 가지 방법을 고집하긴 어렵겠죠. 다만 사회의 주류문화가 흔들리지 않는 방향성을 확보한다면 효과적인 결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재승 : 자연스럽게 요즘 이야기로 옮겨갈까 합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요. 예컨대, 의회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실망, 시민정치로 나아가려는 정치적 변화들이 있었고요. 최근 들어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조롱, 정부에 대한 풍자나 희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신영복 : 우리사회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어요. 웹 2.0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사회 주류 계층의 사고는 웹 1.0사고에 머무는 게 문제죠. 자기 서버를 많이 키우고, 더 강력한 서버에 접속하려는 거죠.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창의적인 서버로 나가려고 하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서로 다르죠.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지배계층의 성격 바뀐 적이 없다

최근에 너무 답답해서, 한국사를 다시 읽으니 이런 게 나와요. 1623년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이후에 지배계층의 정치적 성격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조선 후기 내내 노론, 한일합방 때도 노론 권력체계였죠. 의회정치에 대한 실망이 많다는데, 우리 의회 구성을 보면 국민들의 구성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국민의 대표기관이 못되죠. 사법과 행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히 보수적이고 완고합니다. 또, 언론을 보세요. 거의 보수적인 기조를 갖고 있죠. 이런 상태에서 사회를 바꾸자고 하는 것보단 변방에서 새로운 모델을 가지는 게 좋지 않나 싶어요. 최근에 일어난 안철수 현상, 시민운동을 기반으로 한 서울시장의 당선 같은 건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험하고 있는 과정 같습니다.

정재승 : 그러면 대의민주주의, 의회정치에 대한 체질개선 없는 새로운 시민정치 형태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신영복 : 보수적인 구조가 일정하게 비판되면 그 자체가 달라진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오히려 의회권력이 바뀌게 되면 국회의원 선거법부터 바꿀 수 있죠. 정당투표제를 병행한, 국민들의 구성을 반영할 수 있는 의회도 만들 수 있겠죠. 밖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여러 운동들이 그런 압박이 될 수 있죠.

정재승 : 문제는 기득권자들이 정당투표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요.
신영복 : 그래서 저는 객관적 조건은 굉장히 완고한데, 바꾸려는 주체역량은 대단히 취약한 상태라고 봅니다. 비대칭적인 힘의 대치상태가 실상이라고도 보는데요. 다만, 이런 상황에선 전혀 다른 전략, 전술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대응방식이 있으니까요. 난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신뢰합니다.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유정아 : 정치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다른 사람들을 타자화시키는 근대성까지 바꿔줄 수 있다고 보시나요.
신영복 : 쉽지는 않겠죠. 『놀라운 가설』의 저자 프랜시스 크릭은 내 머릿속에 있는 ‘나’라는 게 뭔가 고민했는데요. 모든 보수성의 기본적인 출발점이죠. 인지과학, 뇌과학에 의하면 한 존재는 다세포로 발전하며, 자기 생명을 여러 기관과의 관계성을 통해 증명한다고 해요. 우리 역사가 근대사라는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을 갖고 왔기 때문에, 나의 관계론적 본성 자체가 잘못 굳어져온 측면이 있습니다. 그걸 바꿔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어요.

정재승 : 혹자들은 『놀라운 가설』을 두고, 놀랍지도 않은 가설을 놀랍다고 주장한 책이라고도 했는데요. 선생님 말씀 듣고 나니 놀라운 얘기를 담고 있네요. 또 한 수 배웠습니다. (웃음)

대학은 백년 뒤를 예비하는 미래담론을 창조해내는 공간

유정아 : 페이스북을 통해 올라온 질문도 받아볼까요. ‘고판동네’라는 아이디가 올려주셨습니다. “꿈의 의미가 비틀어지고, 돈을 벌기 위해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있고, 클럽이나 도서관에 박혀있는 대학생들, 본인의 일 외에는 관심도 열정도 없는 젊은층이 깨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영복 : 정재승 교수가 한 번 답해주세요.
정재승 : 세상을 너무 책으로 배우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사실,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학생들이 학교 교육에 충실한데, 그걸 수행한다고 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죠. 놓고 있으면 왠지 불안하기도 하지만요. 사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도를 쥐어주고, 목적지까지 가장 빨리 가는 법을 계속 훈련시키는데요. 정작 필요한 건,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지도를 그리는 일이거든요. 어떻게 둥지를 틀어야 하는지도요. 세상과 부딪히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으니 학교가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나 물어보게도 됩니다. 요즘 대학들이 인지적으로라도 대학생들을 가두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신영복 :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시기가 청년시절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청년시절이 없는 것 같아요. 학원이나 교실에서 시험, 취업준비만 하니까요. 꿈과 이상을 불태우는 청년시절이 없다면 그의 인생은 사회적 기준에서 아무리 성공했다 해도, 실패했다고 봐요. 마찬가지로 한 사회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대학공간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스펙만 쌓아서 기업에 부품 납품하는 대학이 아닌, 그 사회의 백년 뒤를 예비하는 그런 미래담론을 창조해내는 대학 본연의 공간이 없다면. 한 개인이 청년시절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청년들의, 한 사회의 비극입니다.

한 학생이 와서 시민운동단체에 가서 일을 하고 싶다고 해요. 그런데 엄마가 반대를 한다는 거예요. 주변 사람들이 알 만한데 취직을 하라고 하셨대요. 그래서 내가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엄마와 대화를 해라, 커피빈 같은 커피숍에서 마주 앉아 정식으로 대화를 해라. 그러면 모든 엄마는 다 네 편이다’ 그랬어요. ‘주변 사람들 때문에 꿈과 이상을 접어서야 되겠나요. 힘들지만 좋아하는 일을 위해 살면 안될까요’ 이렇게 정식으로 대화하라고 했어요. 실제로 그렇게 해서 성공했답니다.


모든 엄마는 자식 편이다. ‘정식으로’ 대화하라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럴거에요.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아서 그렇죠.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를 보면 ‘산티아고’라는 목동이 갖고 있는 게 별로 없죠. 가죽물푸대와 무화과나무 밑에서 펼치고 잘 담요 한 장, 책 한 권, 그리고 양떼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죠. 마지막엔 무화과나무 밑에서 보석상자를 캐내죠. 그때 독자는 묻게 됩니다. 연금술이 실제로 있다는 건가? 코엘료가 말하는 연금술은 바로 이런 거죠. 삶에서 겪는 고난의 긴 여정이, 매 발자국 그 순간순간이 황금의 시간이라는 거요. 그게 바로 소설이 보여주는 연금술 같아요.

소유하고 소비하며 만족을 느꼈던 문화, 분명 달라질 수 있어요. 지금 젊은 사람들은 대단히 경쾌해요. 노인들이 뭘 많이 가지려고 해서 문제죠. 전 그런 변화된 정서를 신뢰합니다.

유정아 :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인용하자면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판을 새로 짜보시면 어떨까요. 독자 우종훈님이 물어보셨습니다. “선생님을 좌파지식인이라고 하는 기사를 봤는데 어떠신지요.”
정재승 : 좌파세요? (웃음)

좌우, 진보보수처럼 분석하고 나누는 것은 근대성의 일면

신영복 : 좌우, 진보보수. 분석하고 나누는 것도 근대성의 일면입니다. 그걸 뛰어넘기 위해서 ‘경계’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누가 나한테 ‘경계에 선다’고 해요. 저는 그게 잘못 되었다고 생각해요. 경계는 좌와 우를 나눈다는 전제하게 나오는 말이니까요.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는 건 아니죠. 잘못된, 불운한 역사 때문에 좌와 우가 소통하는 게 아니라 ‘소탕’하고 있어요. 우파로부터 좌파라고 공격당하기도 하는데요.

누가 저한테 이렇게 말해요. 이승만 아니었으면 북한처럼 될 뻔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 때문에 400만명이 죽었다.’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어요. 그때 더디더라도 통일된 정부를 만들었다면 지금 아시아의 스위스 정도는 되어 있지 않을까. 프랑스처럼 좌우가 상생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나 해요. 사실 좌우라는 것, 극단적으로 나뉘지 않는 거예요.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죠.

이론은 좌, 실천은 우로 공존해야 한다

정재승 : 구체적으로는 무상급식, 반값등록금을 지지하시죠?
신영복 : 그 문제는 겉으로 보기엔 좌와 우의 옷을 입고 다투지만, 사실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봐요. 무상급식하면 ‘돈 더 내지 않을까’ 이런 게 핵심이죠. 그런데 이런 문제는 가려지고 좌우로 치환돼서 나타납니다. ‘좌’라는 것은 조금 불편하지만 뭔가 현 단계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가치지향을 하자는 거고. ‘우’라는 것은 현재의 모든 생명을 따뜻하게 지키자는 겁니다. 둘 다 좋은 거고, 공존해야 하는 거죠. 이론은 좌경, 실천은 우경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정아 : 김재형, 우선영님이 주신 질문 이어가볼까요. 저희도 가졌던 의문이기도 한데요. “다른 사람에게 공감, 관용을 베풀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요. 상대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면서 본인도 에너지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신영복 : 적절한 일화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교도소엔 단기수와 무기수가 있어요. 단기수는 만기일만 기다리죠. 무기수는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이죠. 그들의 정서는 고진감래 끝에 뭔가 아름다운 성취가 있을 거라는 패러다임이 필요해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황금의 시간이에요. 그 길 자체를 견딜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제가 ‘길의 정서를 갖자!’고 해요. 삶이란 무엇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죠. 긴 호흡이 필요합니다. 하는 일 자체가 아름답고 보람 있는 자세로 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가 길의 정서로 가자고 말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가다가 코스모스, 사람도 만나고 발자국도 남기며 그 자체로 동력과 자체를 이끌어 가는 거죠. 그런 일하는 자세를 갖는 게 필요하겠죠. 커다란 과제이기도 합니다.

유정아 :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의 정서’ 오늘 담고 갈 키워드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우선영님이 정재승 교수께 질문 주셨네요. “트윗을 보면 강의에 연구, 사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는데, 그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머리가 워낙 좋아 처리속도가 빨라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는 건가요.”
정재승 : 머리 좋은 거 맞고요. (웃음) 흉내 내려 하지 마세요. 다칩니다. (폭소) 사실, 주변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거기서 에너지를 받아요. 도와주고 싶고 참여하고 싶어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되어 왔어요. 남들이 안하는 걸 해보는 걸 두려워하거나, 벽은 없는 것 같아요. 관계와 소통 말씀하셨는데요. 저에게도 소통의 욕망이 강해요.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기뻐하면 저도 그 관계 속에서 저를 찾는 것 같아요.
유정아 : 저도 학교에서 말하기를 10년 정도 가르쳤는데요. 처음에는 모교에서 강의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이 학교 몇 학번이야 이렇게 말했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학기부터는 그런 말을 안 했어요. 몇 학번이라고 했더니, 어떤 학생이 ‘어머 그러면 몇 살이야?’ 이렇게 말하는 걸 듣고 나서였죠. 더 이상 같은 세대가 아닌, 젊은 선생님이 아닌 것 때문에 위축된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세대 간의 폭을 좁히려고 노력을 많이 하시잖아요.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요.


‘여럿이 함께’ 하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

신영복 :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이 버릇없다!’고 하면 제가 이렇게 말해요. ‘당신은 다 살지 않았나. 다음 세상 만들 젊은이들이니 그냥 지켜보라’고 해요. 누가 뭐라고 한들, 젊은이들이 스스로 포맷하고 만들어가야죠. 제가 붓글씨를 잘 써요. 출소하고 사회단체들이 기금 마련전 한다고, 찬조작품 내라고 해서 ‘여럿이 함께’를 썼어요. 궁체와도, 훈민정음 판본체와도 다르다고 사람들이 말해요. 그런데 어느 후배교수가 와서 “‘여럿이 함께’ 참 좋은데, 그건 방법론만 말하고 목표지향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지적을 해요. 그 후로 제가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고 써요.

지금까지 우리는 계몽철학이든, 신학질서든 어디로 갈 건지, 어디로 갈 건가만 고민했죠. 여럿이 함께, 그 사람들이 결정해야 하는거에요. 뭔가 자기들끼리 시행착오하면서 가면 길이 생기는 거죠.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건축적 의지를 허무는 게 필요해요. 여러분들의 역량만큼 만들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앞으로의 세상을 위해서요. 저는 전적으로 신뢰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시행착오하면서 선험적인 건축의지 허무는 게 필요

유정아 : 벌써 2시간이 흘렀네요. 정재승 교수님, 마무리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재승 :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김제동씨에게 상담을 받아요. 그때마다 ‘제가 겪은 일의 천분의 일 정도 되는 고통이네요. 악플 20만개 받아봤어요?’라고 하는거에요. 그런 말을 들으면서, 제 삶으로 돌아오게 돼요. 감옥 말씀하실 때는, 너무 좋은 이야기고 겪으신 것들이 엄청난 일이라 과연 내가 범접할 수 있는 경지인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더 이야기가 지나가면서 선생님 매력에 빠진 것 같아요. 관객들과 같은 위치에서 몰입했어요. 너무 많은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깨우쳐주는 구도 없다. 각자의 그림이 있을뿐.

신영복 :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늘 제가 이야기를 하는 입장이었거든요. 사실, 이야기하고 듣고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구도는 누군가 아는 사람이 누군가 모르는 사람에게 깨우쳐주는 구도는 없습니다. 모르는 건 아무리 얘기해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아는 이야기는 내가 겪은 사진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앨범에 비슷한 사진을 뽑아서 보시면 됩니다.’ 모두 아는 이야기라는 거죠. 감옥만 감옥이 아니라, 처하고 있는 상황은 비슷합니다. 내가 보여드리는 그림,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림이 공감하는 거에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요. 작은 약속도 하고요. 그게 바로 이런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두 분 도와주시고, 질문도 해서 쉬울 것 같았는데 조리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 자신도 정리가 안 되는데 여러분도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걱정도 됩니다. 돌아가서 다시 정리하세요. 앨범에 있는 사진들 꺼내보면서요. 명시적이진 않지만 서로가 작은 약속을 했다고 생각해요. 살아가는 삶의 골목에서 작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노력을 지금부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유정아 : 오늘 애써주신 신영복 교수님, 정재승 교수님께 다시 한 번 뜨거운 박수를 주시면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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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린 ‘소통’ 아닌 ‘소탕’을 해왔다  (0) 2011.01.15
Posted by archita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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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린 ‘소통’ 아닌 ‘소탕’을 해왔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다. 이념적으로 오른쪽이건 왼쪽이건 다른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면 그게 감옥이다. 이념이 아니라도 타인에 대한 편견과 자기 콤플렉스가 우리를 옭아맨다. 자유로운 발상과 창조적 행동이 함께 갇힌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좌파 지식인인 신영복(70) 성공회대 석좌교수. 마흔일곱 살이 되기까지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출소 후 줄곧 “소통과 변화를 가로막는 감옥에서 탈옥하라”는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j의 객원기자인 영화배우 이혜영(전 SBS 앵커)씨가 지난달 31일 신 교수를 만났다.

서울 필동 한국의집 문향루에서 마주 앉은 신영복 교수와 이혜영 객원기자. 이 기자는 부친 고(故) 이만희 감독이 만든 영화 DVD를, 신 교수는 자신이 쓴 책을 서로에게 선물했다. 노래를 끈질기게 청한 이 기자와 별 수 없이 두 곡이나 부른 신 교수가 활짝 웃고 있다.


● 통일혁명당 사건이 뭐예요?

 (신 교수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될 당시 그는 스물일곱 살의 육군 중위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경제학원론’을 가르치고 있었다.)

 “제가 구속된 1968년은 김신조 사건이 나고,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서 나포되고, 예비군 동원법이 만들어지고, 3선 개헌이 추진되고,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해예요. 이런 시기에 간첩단 사건이 터졌는데, 거기에 청년학생운동이 동일 사건으로 엮인 거죠. 그 접점에 제가 있었고요.”

● 감옥 시절을 ‘대학 시절’로 표현하시더군요.

 “제가 원래는 무기형을 받았기 때문에 만기출소를 기다릴 순 없는 처지였죠. 그래서 하루하루 깨닫고 배우는 게 있어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원래 교사 아들로 학교 사택에서 태어나서 (감옥 가기 전까지) 줄곧 학교에만 있었어요. 그래서 감옥 역시 각성이나 변화의 계기가 되는 학교로 받아들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 그래도 잃은 것이 있을 텐데요.

 “많이 잃었죠. 영어 단어도 많이 잊어먹고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도 잃고…. 잃은 게 참 많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깨달은 것도 많으니… 뭐 그런 게 인생 아니겠어요.”

●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시네요. 그런데 (오랫동안 수감됐는데) 언제 사랑할 시간이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혼하셨더라고요.

 “출소 후에.”(웃음)

● 2008년인가, 우주인 고산씨 주례 서셨지요?

 “네, 그런데 주례로서는 제가 좀 적절하지 않다고 봐요. 신랑·신부들은 제가 쓴 책도 읽고 해서 좋아하는데 가족들은 ‘감옥에 있던 사람을 왜 주례로 모셨어?’ 그러거든요. 고산씨 경우는 양가 부모님이 좋다고 하셔서….”

● 강연 요청을 자주 거절하시는 이유도 그런 건가요?

 “그래요. 보수적인 단체 같은 곳에서는 제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조금 불편할 수 있거든요. 젊은 학생들은 몰라도 산전수전 다 겪고 사회적 이해관계가 형성돼 있는 상태에서는 논쟁이 논쟁으로만 끝나고 별 성과가 없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 그래도 교수님을 서민의 술로 접할 수 있으니까요, 뭐. ‘처음처럼’이 선생님 글씨 맞죠?

 “제가 있는 성공회대에서 제 글씨와 그림으로 달력을 만들어요. ‘처음처럼’도 그런 달력 중 하나에 실려 있었어요. 96년에 주류회사에서 달력을 보고선 제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제 글씨가 상업적 용도로 쓰이는 게 별로 좋지 않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제 글씨는, 서민들이 쓰는 ‘민체(民體)’거든요. 가장 서민적인 술의 이름으로 가는 것이 민체의 팔자라고 생각했습니다.”

● 약주는 많이 하세요?

 “오랜 기간 (술을) 트레이닝할 기회가 없어 잘 먹진 못합니다. 그러나 무슨 술이든, 한두 잔은 따라갑니다.”

● 교육감이나 정치에 대한 생각은 없으신가요?

 (지난해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진보계열에서 그를 서울시교육감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신 교수는 고사했다.)

 “제가 교육계에 있긴 하지만 교육감은 젊은 사람이 해야 해요. 교육은 10년, 20년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젊은 분들이 장기 프로젝트로 열심히 하는 게 옳아요.”

● ‘변방의식’이란 어떤 것이죠.

 (신 교수는 최근 나온 서울대 강연집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에서 ‘변화하기 위해서는 변방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개인이든 사회든 부단히 변화해야 됩니다. 그런데, 중심부는 변화할 의지가 없어요. 반드시 변방이 변화의 중심이 돼요. 역사적으로 보면 문명의 중심도 계속 변방으로 옮겨오잖아요. 그 이유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해요. 변방이되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하는 거죠.”

● 교수님은 중심부 콤플렉스가 없으세요?

 “제 위치는 우리 사회의 중심부는 분명 아니고요. 저는 지식인은 중심부에 서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비판적 관점에서 대안담론, 비판담론을 만들어 내는 게 지식인의 임무죠. 제게 콤플렉스가 비교적 적은 이유는 변방과 마이너리티(minority)의 위치가 지식인으로서 저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 그런 콤플렉스가 우리 사회의 소통을 막는 장애물일까요.

 “진정한 소통이란 ‘너는 그렇게 생각해라. 나는 이렇게 생각하겠다. 그냥 공존하자’가 아니에요. 차이나 다양성을 내가 변화할 수 있는 ‘반가운 만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근대의 패러다임은 개인·기업·국가 모두 자기 존재를 강화하는 것이었죠. 게다가 우리는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했어요. 60대 이상의 세대로선 ‘소통’이 아니라 ‘소탕’을 해온 거죠. 그들에게 공존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잖아요. 이런 문화가 우리 사회 일각에 아직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어요. 또 보수 구조가 아주 완고하기 때문에 좌우의 바람직한 균형, 대칭적 균형이 안 되는 것 같아요.”

● 진보 쪽에서도 자신과 관점이 다른 사람과는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 것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후배 중 일부는 저더러 ‘왜 중앙일보하고 (인터뷰) 하느냐, 한겨레하고 해야지’ 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한겨레 독자들은 선생님 글 안 읽어도 돼. 중앙일보 독자들하고 만나는 게 필요하다’고 해요. 제도권 언론 중에선 중앙일보가 가능성 있는 신문이니까…. 나는 그런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자기 보신을 한다거나, 자기 이미지 관리 때문에 좁은 범위에서 행동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 천안함, 연평도 사건 이후 진보계의 대응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요.

 “사건 자체에서부터 출발하는 사고보다는, 우리 사회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재규정하는 관점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민족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두 개의 기본적인 축이 있다고 봐요. 하나는 개방성이고, 하나는 자기주체성이었죠. 역사적 구조에서 보면, 남북관계란 것은 단지 이념적 분단이라기보다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두 개의 축이 밖으로 드러난 측면이 있어요. 최근의 남북관계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굉장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던 면이 있어요. 그러한 과정에서 천안함 또는 연평도 사건이 돌출된 면이 있습니다.”

● 통일은 언제쯤 될까요?

 “저는 무리한 통일에는 반대합니다. 통일할 수 있는 역량도 아직 갖춰지지 않았고요. 저는 ‘통일’을 한자로 쓸 때, 거느릴 통(統) 자를 쓰지 않고, 소통할 통(通)자를 쓰기도 합니다.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평화를 정착하는 기간을 그냥 계속 끌고 가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시점에,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시기에 적절한 형태의 통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합니다.”

● 성공회대 교수님이라고 했더니 신부님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종교는 없으시죠?

 “예, 없습니다. 하지만 ‘도구로서의 신’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톨릭 신자인 친구가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는데 그분이 ‘참,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나, 하느님이 원망스럽다’ 이런 얘길 했대요. 그러면서 그 친구는 ‘우리가 누군가 원망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해요. 하지만 저는 원망 안 해요. 제가 독방에 있을 때 ‘왜 다른 사람은 자살도 하는데 나는 무기징역이면서 이 추운 독방에 앉아 자살하지 않고 앉아 있나’ 그런 고민을 심각히 한 적이 있어요. 추운 겨울에 독방에 있으면 신문 펼친 정도 크기의 햇볕을 두 시간가량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던 경험이 있어요. 인생이란 20년의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2시간의 햇볕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했습니다. 나는 정말 그 어느 것도 원망하지 않아요.”

● 그 햇볕에서 ‘햇볕정책’이 나온 건가요?

 “글쎄요. 그런데 바람이 못 벗기는 옷을 햇볕이란 수단으로 벗긴다는, 그런 전략적 개념이라기보다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랑, 굶주리는 북녘 동포나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이 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교수님을 해탈한 부처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이미지가 부담스럽진 않으세요?

 “부담스럽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교도소에서 검열을 예상하고, 또 가족들이 읽을 글이기 때문에 엄격한 자기 검열을 하고 정제된 글을 썼었잖아요. 그 글을 읽은 독자들은 또 그런 글을 저한테 요구해요. 그래서 지금 감옥에서 나와서도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요. 가능하면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 안 만나고 싶고…. 왜냐하면 또 빳빳하게 서 있어야 하고, 뭐 허술한 이야기나 싱거운 농담도 못하고 불편하니까….” 

1968~1988 감옥의 추억

“교도소 축구서 공격 맡았죠 … 이기면 버터를 얻었거든요”




신 교수는 의 j요청에 1면 제호와 ‘함께 여는 새날’이라는 글귀를 흔쾌히 써줬다.

● 붓글씨로도 유명하신데, 언제 공부하신 거예요.

 “어려서 할아버지 사랑방에서부터 죽 서예를 익혔고, 또 교도소에 있을 때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죠. 좋은 선생님도 만났고요.”

● 좋은 선생님은 거기에 어떻게 들어오셨죠.

 “저 있던 교도소에 소장이 새로 부임하셨어요. 이분이 대전지역에 굉장한 명필(名筆)이 한 분 계시다는 것을 아셨어요. 당시 우리나라에 생존한 분 중에는 유일하게 중국 고궁박물관에 글씨가 들어간 분이셨어요. 신임 소장이 그분 글씨를 하나 받을 욕심으로 교도소 서도반(書道班)에 그분을 모셔왔어요. 교도소에 불교반·가톨릭반·서도반 이런 게 있었는데, 말하자면 서도반을 판 것이죠. 그래서 그분이 교도소에 오셔서 제 글씨를 보시게 됐어요. 교도소장에게 저에 대한 얘기를 들으시곤 ‘이 사람이 지금 귀양 와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셨대요. 그러더니 매주 하루씩을 오셔서 글씨를 가르쳐 주셨어요. 아마 한 달쯤 오시고 나서 소장이 글씨 한 장을 얻지 않았나 생각돼요. 더 이상 안 오셔도 될 텐데, 이 선생님이 계속 오셨어요. 7년 동안이나요. 고(故) 정향(靜香) 조병호(1914~2005) 선생이셨죠.”

 신 교수는 그의 글씨체를 감옥에서 완성했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도 이 글씨체로 썼다. 그래서 그 글씨체를 ‘옥중서신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 편지들을 모은 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이라는 책이다.

● 나중에 책을 내실 생각으로 편지를 쓰셨나요.

 “그 글에는 고민이나 원망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도소 당국의 검열을 통과해야 하는 편지니까요. 그 책만 보면 ‘아주 반듯하게 감옥살이를 했구나.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는 독자가 많죠. 사실은 괴로운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편지는 당시 유일하게 집필이 허용된 공간이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쓸 수 있었죠. 제가 감옥이라는, 판이한 공간에 던져졌을 때 느끼는 충격이 많았어요. ‘그걸 그냥 두면 그냥 물처럼 흘러가서 다 잊어버리겠구나, 이걸 어딘가 기록해 두면 언젠가 다시 내가 생환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한 달간 내가 고민하고 생각했던 걸 다 정리해 썼던 것이죠.”

● 당시 재소자들과의 관계는 어떠셨나요.

 “교도소에서 한동안 제가 ‘왕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제게 약간의 거리감을 두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교도소 안에서 우리가 일하는 공장과 다른 재소자들이 일하는 공장의 축구 대표팀이 시합을 했는데 이겨서 상으로 버터를 타왔어요. 그 버터를 저녁 국통에 집어넣으면서 선수 하나가 연설을 해요. ‘이 버터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공장 축구선수들이 피나는 접전 끝에 몇 대 몇으로 이기고 따온 버터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막 박수를 쳐요. 그래서 ‘내가 축구선수를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교도소는 운동장이 작아 축구선수가 11명이 아니고 7명이에요. 한 공장에 100명쯤 되는데, 그중에서 7명이면…. 교도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 운동을 잘해요. 싸움도 잘하고. 그런데 그 일곱 명에 제가 들어갔어요. 그러고 그 공격 선봉을 제가 맡아서…. 제가 성공회대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도 교수 축구팀을 했죠.”

● 감옥에서 부르셨다는 18번 레퍼토리 ‘시냇물’을 들어봐도 돼요?

 “18번요?”
 “그게… 안 불러도 돼요. 가사만 전달하면 돼요. 원래 곡이란 것은 가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니까.”

● 그러니까 어떻게 전달하셨는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신 교수는 애창곡을 뽑고야 말았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그러고 내친김에, 그가 감옥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다는 영화 ‘부베의 연인’ 주제가도 부르고야 말았다.

● 노래방 같은 데도 가세요?

“서화 전시회 끝나고 한번 갔었는데, 참 좋더라고요. ‘아, 내가 공부할 노래도 참 많구나’하고 느껴서 ‘시내 나왔다가 한두 시간 빌 때에 혼자 가서 연습해야지’했는데 이건 쑥스러워서….”


신영복 교수


1941년 경남 의령 출생
1959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
1968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88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 성공회대 경제학과 강사
1998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06년 정년 퇴임. 현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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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그 이름 석자만으로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분이다.

고등학교시절, 『TV,책을 말하다』를 통해 접하게 된 후 어이없이 읽어버렸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동을 넘어 얼얼한 충격을 던져주었으며, 두고두고 마음에 간직하고픈 또 하나의 동경이 되어버렸다.
감옥이라는 물리적으로 한계와 철저하게 정제된 글 속에서 마저 그의 사색은 자유로움이 되어 춤을 추고 있었다.

이시대의 좌파지성이란 평은 잘 모르겠다. 
MC 김제동의 말처럼 "무대에 서서 좌측을 조금 더 많이 바라보고 진행을 하니까 좌파라고 하면 좌파지요,"라는 말처럼
개인의 사고와 생각을 하나의 색으로 물들여 버리고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정치놀음에 익숙해진게 아닐런지.

소탈한 그의 이야기와 그의 세월과 시간을 오롯이 담은 그의 글씨에서
엿보이는 그의 삶이 그저 좋고. 아름답다.
 
어쩌면 또하나의 작은 도전의 시작이 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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