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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FOLIO/STORY BOARD'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2.03.07 Intouchables.
  2. 2012.03.04 앓이.
  3. 2012.02.20 여전히 아이.
  4. 2011.03.11 『감응(感應), 정기용선생_ 그의 마지막에 부쳐』


난 누군가가 가진 저마다의 아픔, 슬픔들이 비교될 수 없는 각자에게 절대적인 것이란 말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각자의 처지, 상황에서 겪고, 느끼고, 아픈 그 모든 것들조차 결국은 상대적인 것들에 대한 결과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고민하고, 아파하는 수많은 것들이 각기 다른 것들이기에 결국 같음이 없어 비교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비슷한 상황, 그 결과들에 빗대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익숙해져 절대성을 결국 상대성을 통해 얻어내려는 오류를 범하며 그 속에서 신음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전부 상대적인 것들에서 온 것들이라면 그것이 절대적이라 말하는 것이 옳을까?

난 그냥 단순하게 바라보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굳이 이해한다커니 말하고 싶지 않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게되면 알게된 딱 그만큼만 안다 말하는 것이 내겐 공감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땐 참 많이도 속여왔다. 모르면서 마치 아는척, 이해하는 척, 글로 배우고 말로 들은 것을 마치 내 것인양 포장하면 그것이 정말 내 것이 될 수 있을거라고 착각했었다. 꼬마 애가 자기의 잘못을 숨기려 이런 저런 거짓말을 하지만 결국 어른의 눈에는 그 거짓말들이 훤히 다 보인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오늘 본 영화에 등장한 두 주인공은 굳이 애를 쓰며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친구가 되었다. 
사지마비의 고통을 알아달라 호소하지 않았으며, 두터운 부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남들의 말로 단정짓지 않았으며, 남들의 방식을 따라서 대하지 않았다.
건강한 몸을 부러워하며 자괴감에 빠질까 지레 걱정하며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미친듯 춤을 췄으며,
유명한 클래식 연주를 커피광고의 배경음악, 톰과 제리 만화음악 정도로 밖에 모른다고 무시하지 않았다.
예술이 인간보다 앞선 유일한 것이라는 안목은 
마구 문질러댄 몇번의 붓질과 흩뿌려 흘러내린 몇번의 물감칠을 재능으로 바라봐 주었으며
면도날로 떠올린 죽음을 수염을 마구 잘라내는 장난으로 지워버리고 귀를 즐겁게 해 줄 사람을 선물해 주었다.    
서로의 상황과 처지를 비교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고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그냥 진심으로 대했다.
진심.

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모르는 걸 아는체 할 필요도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척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서로의 다른 생각, 시각으로 솔직하게 대하는 것.
지식의 차이도 문제될 것이 없고, 
문화의 차이도 장애가 되지 않으며, 
지위고하를 막론할 수 있음이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

goodbye yale and corn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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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이.

PORTFOLIO/STORY BOARD 2012. 3. 4. 03:15
마음과 달리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하루 꼬박을 앓고 나서야 겨우 일어났다.
하루종일을 누워있어서였을까?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온다.

그간 앓던 감기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나를 집어삼켰다.
배즙, 토봉령, 생강차, 중국차 등 
나름 감기잡는 온갖 약재들도 힘을 못쓰는 듯.
결국 감기와 한달을 함께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에
찾아온 앓이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제 겨우 처음이다. 
나머지 열번의 이야기가 또 한번 나를 성숙시켜주길 기대해본다.


Dear Min-Gu JANG,

We regret to inform you that after careful consideration of your application, the Admissions Committee is unable to offer you admission to the Harvard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Design.  We would like to underscore that the Committee is keenly aware that there are many strong candidates whom we are unable to admit.

We very much appreciate your interest in the Graduate School of Design and wish you the best in your educational and career pursuits.

Sincerely,                                                                                      

Gail Gustafson and Geri Nederhoff
Directors of Ad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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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눈시울이 붉어질 감정이 사라질까봐 두려웠었나보다.
누구보다 강한 나라며 상황과 환경들에 약해질까 무서웠었나보다.
힘에 겨울 만큼, 차디찬 겨울이니만큼
마음이 차가워질까 그렇게 떨었었나보다.

앞마당 조그만 화단에 동전을 심어두었던 철없던 아이. 
자존심 강하지만 평범했던 아이.
보이기 위해 숨기는 것이 익숙했던 아이.
숨기기 위해 속이는 것이 쉬웠던 아이.

여전히 아이.


어느덧 서른.
또 그렇게 시작.

86년 한장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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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내려온지 만 하루가 되기전 그의 마지막을 알리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지난 전시회를 통해 마지막으로 접한 그는 이제 더이상 이곳에 없다.
개인적 친분이랴, 감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존재였을지 모르나 그를 기억하는 바 내겐
존경에 마지않는 몇 안되는 건축가였다.

불연듯 그가 내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던 하나의 사건이 기억이 난다.
2009년 봄, 서울대학교에서 교류학생으로 지내던 중 대학원 주최의 강의에 참석했더랬다.
목이 잠겼다며 마이크로 말문을 여시던 그의 모습이 그를 실제로 만난 첫 대면이었다.
지금에야 기억이 잘 나지않지만 분명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며 이야기의 한 꼭지를 이어나갔었다.
장민구...그저 지나가는 말 한마디가 오늘 이렇게 기억 날 줄 누가 알았으랴,

잡지에 실린 글을 통해 처음 '정기용'이란 이름 석자를 기억하기 시작했었다. 그가 무엇을 지었는지, 어디서 공부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글 속에 묻어난 그 사람이 날 강하게 자극했고 그냥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 그를 동경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사저를 지은 사람... 
노 전대통령이 서거한 후 세상을 향해 던진 그의 독백에서 조차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부끄러움를 가지게 한 그는
오히려 그에게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내 눈이 정확했음을 다시 확인시켜준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으리라.

잠시 그의 글을 다시 읽어본다.




 5월 23일 토요일 하루 종일 찌푸린 하늘아래 가랑비가 흩뿌린다. 비극적 소식을 접하고 하루 종일 가슴이 애린다. 끊임없이 눈물이 고인다. 통곡할 수밖에 없는 이 큰 슬픔과 놀라움 속에서 하루가 지난 오늘새벽까지도 부엉이바위는 내 눈앞에 나타나 나의 시야를 흐리게 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하고, 지금 떠나서는 안 되는 분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심경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꼭 그렇게 해야 한다면 오늘 나는 고백해야만 한다. 그동안 가슴속에 꾹꾹 참아왔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아야만 하겠다. 
 
 지난 2년 반 동안 나는 노무현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를 설계하고, 봉하마을 계획들을 옆에서 거들어 오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노무현대통령은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훌륭한 건축주이셨다. 집짓기를 위한 회합을 거듭할수록 계획안은 점점 나아졌고, 서로 간에는 드디어 신뢰와 공감이 생겨났고, 퇴임 후 사저로 입주한 후에도 이런저런 일로 찾아뵙고 또다시 봉하마을 생활 속에서 피어난 꿈의 계획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두 가지를 마지막 가시는 길을 위해 밝혀야만 한다. 한 가지는 세상 사람들이 TV카메라에 비친 모습만 바라보는,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저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귀향한 한 농촌인으로서 농부 노무현이 꿈꾸던 소박한 세계를 알리는 것이다. 오늘의 이 비통함과 가슴 저리는 심경 속에서 우리가 갖춰야 되는 최소한의 예의는 고인에 대해서 끈질기게 널리 퍼뜨렸던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봉하마을의 사저는 내가 설계했기 때문에 건축가인 내가 제일 잘안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봉화아방궁이라는 말로 날조해서 사저를 비하하는 정도가 아니라 악의마저 엿보이게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나는 대통령에게 내가 나서서 기자회견을 해야겠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래봐야 아무소용이 없으니 참으라고 하셨다. 나중에 다 밝혀질 일이지만 내가 설계한 대통령의 사저는 재료로 말하자면 흙과 나무로 만든 집이다. 그리고 아방궁이 아니라 불편한 집이다.
 
 처음 만남에서 농촌으로 귀향하는 이유를 대통령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농사도 짓고 마을에 자원봉사도 하고, 자연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도심아파트 같이 편하게 살아서는 안 되고, 옛날 우리조상들이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어 살았듯이, 한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는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서 이동하는 방식의 채 나눔을 권유하였다. 한 공간에서 모든 것이 편리하게 배치되어 있는 도시의 집과 달리 식사를 하거나 집무실로 이동할 때마다 봉화산을 바라보거나 공기 내음을 맡으면서 농촌에 살고 있음을 환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대통령은 흔쾌히 동의 하셨다. 흙집에다가, 도시 사람으로는 살기에 불편한 집. 그러나 품위가 있고 자연과 조화로운 집, 그런 집을 결과적으로 원하신 셈이다. 그리고 경호원들과 비서진들의 공간은 너무 떨어뜨리지 말고 한 식구처럼 생활하도록 주문하였다. 집이 다소 커져 보이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경호동을 안채와 붙여서 비서진들과 경호원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나는 중정형의 집으로 화답한 셈이다.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나라에서 권위주의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확장한 분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이다. 건축가는 안다. 건축주가 누구이며 집을 통해 무엇을 실현하려는지.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지붕 낮은 집”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봉하마을 주민들의 농촌소득 증대사업을 유기농법으로 전환시키고, 봉화산과 화포천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치유하며, 궁극적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생태교육의 장을 만들고자 하셨다. 재임시절 풀지 못한 숙제 중 하나인 농촌의 문제를 스스로 몸을 던져 부닥치려는 대통령의 의지는 퇴임 후 일 년 내내 쉴 새 없이 지속되었다. 앞으로 마을뒷산 기슭에 ‘장군차’도 심을 예정이었고, 마을 마당 앞뜰에는 마을특산물매장도 꾸리고 노무현표 브랜드 쌀도 팔 계획도 세웠다. 특히 장터 지하 쪽에 작은 기념도서관 건립도 꿈꾸고 계셨다. 민주화운동시절 당신이 가까이했을 수밖에 없었던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 당시의 젊은이들의 양식이 되었던 모든 책들을 모아 작지만 전문적인 민주주의 전문도서관을 구상하고 계셨다. 농사도 짓고, 자연과 생태를 살리고, 나아가서는 작은 동물농장을 봉화산자락 부엉이 바위 밑에 만들어 청소년들과 함께 하려는 생각들이 바로 인간 노무현대통령이 꿈꾸던 소박한 꿈들이었다. 그리고 틈틈이 폭넓은 독서에 빠져 통치시절을 정리하며 집필 작업에 임하셨다. 독서와 토론은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서 즐기던 값진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대통령은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것은 내 탓이다. ‘산은 멀리 바라보고 가까운 산은 등져야한다’는 조상들의 말을 거역하고 집을 앉힌 내 탓이다. 봉화산 사자바위와 대통령이 그토록 사랑하던 부엉이 바위 가까이에 지붕 낮은 집을 설계한 내 탓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자. 노무현 대통령이 목숨을 던져 우리들에게 남긴 질문들을.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이 애통함 속에서 한 마디의 단어, 그것은 ‘순교’이다. 한국 현대사 속에 심연처럼 가로놓인 질곡들, 멍에들, 허위의식들, 인간의 탈을 쓴 야수성들. 이 모든 것을 안고 간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나는 순교라고 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 나는 부엉이 바위 밑에 작은 동물 농장의 그림을 보여주기로 한 약속을 못 지킨 채 지금 봉하마을로 내려간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도 바로 거기에 계시므로.

정기용/건축가



그는 이제 세상에 없다. 그의 죽음이 누군가에겐 가슴 절절한 아픔이기도, 또한 슬픔이기도 할 것이다.
티끌만한 관계에 이리 시간을 쓰며 그를 애써 기억해 내는 나같은 사람도 있으리라.
후일에 그의 아들이 그 아비의 궤적으로 좇아 하나의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또 한번 기억할 수 있으려나.
건축가 정기용은 이제 세상을 등지고 떠나갔다.

그의 전시회를 다녀온뒤 차일피일 미루며 전시후기조차 정리하지 못한 난
오늘에서야 이렇게 한조각 흔적을 기록한다.
언젠가 그가 말한 인간이 먼저된 건축가가 되어 그를 다시 한번 기억하고 싶다.

일전에 담아두었던 그의 강의를 함께 올려본다.
용량의 한계였던가, 배터리 문제였던가 끝까지 담지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오늘에서야 정리되어 남겨지는 소중함이랄까?
기록으로 수고한 오래된(?) 근호의 카메라에 고마움을 전한다. 
전시회 사진은 다음 기회에 정리해서 올려 보리라 또 한번 미루면서 글을 마친다.  






三病一藥

건축가의 3대 병

첫번째 병은 문화병
두번째 병은 대가병
세번째 병은 유토피아병

병은 세가지지만 약은 하나다.
그 약은 '현실'이다.
현실은 타협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섬세하게 읽어야할 텍스트다.

삶을, 땅을, 시대를 바라봐야 해...

                                                                             강의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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