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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생태』

LIBRARY 2011. 2. 24. 04:02


예술과 생태

박이문 지음

미다스북스 / 2010 12 / 363 / 18,000

 

저자 박이문

1930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불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대 불문과 전임강사를 하던 중 조국을 떠나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등지에서 30여 년 동안 지적 탐구의 교편생활을 한 후 귀국하여 포항공대에서 철학을 강의하다 정년퇴임한 뒤 현재는 시몬즈 대학과 포항공대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희수를 넘긴 지금은 인생을 갈무리하며 철학적 저작 집필에 몰두하는 한편, 시인으로서 마지막 창작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한편 100여권에 이르는 저서로 시와 과학,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상학과 분석철학, 노장사상, 명상의 공간, 문학과 철학, 문명의 위기와 문화적 전환, 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 나의 출가,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둥지의 철학 등의 예술, 미학, 철학적 저작과 인문교양서, 그리고 시집 눈에 덮인 촬스강변, 나비의 꿈,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 울림의 공백, 고아로 자란 코끼리의 분노, 영어 시집 Broken Words, Zerbrochne Worter 등이 있다.

 

이번에 펴내는 예술미학에 관한 인문철학서인예술과 생태 - 우리시대 철학적 지성의 예술미학 강의 21세기 환경에 대한 생태학적 고발과 심미안이 담긴 시집고아로 자란 코끼리의 분노는 최근 그의 사상적 거점과 창작적 방향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Short Summary

과학이 비춰주는 세계는 한계가 있다. 과학의 빛은 오로지 이미 존재하는 물리 현상에만 국한된다. 과학적 앎은 한계를 의식한다. 물질 현상을 넘어서, 그 이전의 세계는 과학으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놓여 있고, 그것은 과학의 빛이 미치지 못하는 어둠으로 남아 있다. 사물 현상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자연 현상이 존재하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떠한 상상도 미치지 못하는 무한한 공간, 무한한 시간, 아니 공간과 시간의 의미가 무의미해지는 자리에서 천당과 지옥, 영생과 종생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이처럼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는 이른바 해탈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해탈이냐? 그러한 해탈은 결국 구체적인 우리의 이 시시한, 너절한 삶을 얼룩지게 하는 희로애락에 대한 의미를 밝혀주고, 살과 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시간과 공간에 매어 있는 이 하잘것없는 삶의 문제들을 풀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그리고 우리는, 아니 인류는, 끊임없는 희망과 좌절, 의미와 무의미의 애매한 중간 지역에서 헛될지 모르지만 애를 쓰고, 착각일지 모르지만 주장하고, 질지 모르지만 투쟁하고, 배반당할지 모르지만 사랑한다. 어둠과 빛의 중간 지역에서 우리는 모르지만 알려 하고, 쓰러지지만 다시 일어나고, 결국은 죽지만 살려고 한다. 여기에 담은 글은 거의 모두 지난 10여 년 동안 학회나 특강을 위해서 국제적 및 국내적 학회에서 영어 또는 한국말로 발표했던 논문들 가운데서 예술과 생태문제에 관련된 18개를 모은 것이다. 

 

차례

프롤로그 - 어둠과 빛

 

1. 예술

1. 미학과 예술철학

2.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사

3. 예술의 원형으로서의 공예

4. 둥지의 건축학

5. 예술이라는 언어의 꿈

6. 시의 개념과 시적 둥지

7. 시인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

8. 시적 혁명

9. 자기해체적 예술창조 과정

 

2. 생태

10. 생태학적 합리성과 아시아 철학

11. 지구촌, 동아시아 공동체 그리고 문학의 역할

12. 지구촌 시대의 문화 비전

13. 생태 위기와 아시아의 사상

14. 생태 위기와 아시아 생태문화

15. 지구촌에서의 고통과 공생을 위한 인문학

16. 환경 윤리의 철학적 초석

17. 생명의 존엄성과 윤리적 선택

18. 세계의 예술적 변용

 

후기

 

  

1. 예술

 

미학과 예술철학

미학과 예술학 : 학문적 범주로서 예술학(Studies on Art)은 미학(Aesthetics)의 일부일 수 있지만 미학은 예술학의 일부가 아니다. 예술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이 반드시 미적 존재가 아니며, 미적 존재가 반드시 예술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 는 감각적 경험의 한 속성이지만, 그 자체는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예술은 자연적 혹은 문화적 사물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각적 대상, 사건, 내면적 경험 등을 지칭하는 일종의 기호언어라는 것이 그 의미 해석 및 가치평가이다.

 

미학의 문제 :  는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떤 상태에 대해서 갖는 경험 내용을 서술하는 하나의 범주다. 즉 지적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감각 대상을 대할 때 경험하는 주관적인 심리 내용의 한 양상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때,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을 지칭하는가, 즉 어떤 대상이 어떤 경우에 아름답다고 서술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일종의 심리학이다. 예술이 미학의 일부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예술만이 미학의 대상은 아니다. 예술이라는 개념은 , 혹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과 동일하지 않다. 예술사가 미학사가 될 수 있지만 예술사가 곧 미학사는 아니며, 미학사가 곧 예술사는 아니다.

 

아름다움이 그 자체를 보편적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간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특정한 심리현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이 지칭하는 구체적인 경험 대상이나 경험 내용은 개인이나 집단, 연령이나 시대에 따라 가변적이다. 미학 또한 인간의 자연, 사회, 시대, 문화, 역사 등 구체적 조건들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리탐구로서 미학은 생물학, 사회학, 인류학, 문화과학, 역사학 탐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와 같은 탐구가 곧 미학은 아니다.

 

예술의 문제 : 의 범주가 위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적으로의 범주에 속하는 것과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 동일시되어 왔고 따라서 두 가지 범주에 속하는 것들의 문제가 동일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혼동은 일반 대중뿐 아니라 전문 예술가, 예술철학을 한다는 이들에게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미학의 문제와 예술의 문제는 사뭇 다르며 그것들의 경험   과학적 즉 실증적 문제와 철학적 문제에서도 각기 그 차원이 다르다.

 

예술작품을 둘러싸고 이와 같은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은 그러한 문제에 관한 대답이 궁극적으로 애매모호하거나 모두가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시비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예술가나 예술작품의 대중적 관람자들 간은 물론 예술비평가, 예술사가 그리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하이데거, 단토와 같은 예술철학자들 간에도 다같이 공감할 수 있는 대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둘러싼 위와 같은 문제는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보편적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모든 것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대상의 존재를 전제하고, 존재의 전제가 그러한 대상의 개념을 전제한다면 예술에 관한 문제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 중에서 가장 인과적이며 근원적이고 논리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술이란 개념 규정이다. 개념 규정은 곧 철학적 활동의 핵심 기능이다. 예술의 철학적 규정 즉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전제하지 않고는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은 겉돌 뿐이다. 다른 종류의 인식 대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예술의 경우도 의미 있는 담론은 개념 규정에서 시작해야 하고 개념 규정에서 끝나야 한다.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사

존재론적 정지  소멸  죽음으로서의 종말 : 종말이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존재론적, 인식론적 의미로 사용된다. 종말이라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관념은 종교적, 철학적, 과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의 의식 속에 깊이 존재해 왔다. 그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힌두   불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무와 공의 형이상학적 사상,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깔려 있는 종말론적 세계관에서 나타난 이래 아직도 세계 인구의 절대 다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식론적 부적절성   오류  무효성으로서의 종말 : 벨팅과 단토(예술철학자이자 예술평론가) 이전에는 종말이라는 개념이 한결같이 존재론적 정지   죽음   소멸을 지칭했다. 이에 반해서 벨팅과 단토의 경우 그것은 예술일반, 더 정확히 말해서 예술창작 활동의 정지, 예술작품의 소멸, 예술에 관한 역사적 및 그 밖의 담론의 죽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종말이라는 개념은 어떤 사물들의 의미, 평가 및 역사를 설명하는 데 암묵적으로 전제된 예술에 대한 개념 규정의 인식론적 부적절성, 오류, 무효를 지칭하는 말일 뿐이다.

 

지금까지의 예술 개념의 문제점 : 단토는 예술시대(Era of Art)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세계의 예술을 통시적으로 가령 라스코 동굴의 들소 그림으로 대표되는 원시시대에서부터 르네상스의 중반에 해당되는 13세기까지의 작품을 예술시대 이전의 예술 20세기 초 마네의 그림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중반 1964년 워홀의 작품이 뉴욕의 한 화랑에서 전시될 때까지 지속된 모더니즘운동 기간의 작품을 예술시대의 예술, 그리고 워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폭발적으로 생산된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예술시대 이후의 예술로 각기 3등분 한다.

 

이 세 시기의 특징은 예술의 개념에 대한 존재 여부와 관련해서 첫 번째 시기는 예술이 자신을 다른 사물과 구별하는 근거로서의 예술의 개념   본질에 대한 의식이 부재하였던 역사 이전에 존재했다는 점에서, 두 번째 시기는 바로 그러한 의식이 깨어나서 예술이 자신의 본질   정체성을 찾는 데 쏟은 노력의 시기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세 번째 시기는 예술이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찾아내어 그것에 맞추어 작품을 생산하고자 했던 규범으로서의 본질   정체성의 역사적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이른바 다원적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각각 다르다.

 

이와 같이 볼 때 예술시대의 담론 분석과 비판을 통해서 단토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예술 역사상 처음으로 지금까지 존재해 온 것만이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든 예술작품에 일관적으로 적용되어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예술 본질의 발견, 예술 개념의 정의를 제안한 데 있었다.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단토의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은 철학적 차원에서 예술의 본질을 찾아내고 그것의 개념을 분명히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예술 시대에서 지오르지오 바자리(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평론가)와 클레멘트 그린버그(모더니즘을 대변했던 평론가)가 했던 작업이 결국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올바르고 분명한 개념 규정에 있었던 것은, 그러한 본질의 발견과 개념 규정이 전제되지 않고는 예술사는 물론 예술에 대한 어떤 담론도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지금까지의 모든 예술 담론에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잘못된 본질   개념   정체성의 규정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렇다. 예술의 명확하고도 보편적인 개념 규정이 없이 어떻게 예술작품을 비   예술작품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으며, 그러한 구별이 전제되지 않고는 예술작품의 해석, 감상, 평가 그리고 역사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예술의 원형으로서의 공예

해체시대의 문명  문화와 공예의 개념 : 공예라는 제품과 예술작품을 비롯한 그 밖의 제품과의 구체적 경계는 무엇이며, 공예라는 개념과 예술이라는 개념 간의 논리적 차이는 어디서 어떻게 투명하고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는가? 도대체 플라톤이나 데카르트, 분석철학자나 현상학자가 추구했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공예의 정체성이 존재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최근의 시대정신에 비추어 볼 때 부정적이다. 절대적 인식, 따라서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보편적이고 무질서한 상대주의의 쓰나미가 닥쳐와, 과학적 이론과 기술이 잡아준 대로 각자 제자리를 질서정연하게 지키고 살아가던 과학기술 문명이라는 마을은 순식간에 쑥밭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견고하다고 믿었던 문명   문화의 마을이 근본적으로 해체Deconstruct되고 그곳은 혼돈과 혼동의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

 

모든 것이 자명하다고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모든 존재들 간의 경계가 분명치 않게 되었다. 상대성이론이 보여준 시간과 공간의 경계, 양자역학이 입증한 존재의 근원적 불확정성, 괴델의 수학적 명증성의 불충성 원리, 데리다Derrida의 철학적 해체 등으로 알 수 있듯이,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철학이 정밀한 논리에 천착하면 할수록 그러한 사실이 더욱 드러나고 있다. 동물과 인간, 식물과 동물, 생명과 물질, 마음과 몸, 노란색과 회색, 파란색과 붉은색, 이성과 감성, 종교와 철학, 과학과 철학, 철학과 문학, 예술과 비예술, 존재와 무, 인식과 존재의 구별과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이와 같은 개별적 존재들 간의 근원적이며 보편적인 경계선의 부재와 그로 인한 혼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별적인 존재의 정체성, 존재들 간의 경계선 등의 개념들을 재규정함으로써 세계를 재해석하는 데 있다. 문화의 한 산물인 공예의 존재론적 정체성, 개념적 재규정 및 다른 존재와의 경계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공예와 예술의 정체성 : 공예는 어떻게 정의되어 왔으며 그것의 존재론적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에 앞서 공예와 가장 유사한 개념인 예술의 개념을 살펴보자. 존재론적 혼동과 개념적 혼돈이 가장 뚜렷하게 도출된 문화적 산물은 미술품으로 분류된 제품이다. 그래서 이 미술품에서 드러난 혼동을 분석하면 공예의 개념을 재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예의 정의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콜링우드Collingwood는 예술의 개념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예술품을 지칭하는 낱말인 아트Art와 공예품을 지칭하는 낱말인 크라프트Craft라는 두 낱말의 어원적 의미에 주목한다. 크라프트와 아트는 어원적으로 다같이 어떤 물건을 만드는 기술Technique, 솜씨Skill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런 것을 만드는 과정은 사뭇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콜링우드에 의하면 그 기술   솜씨는 어떤 경우 이미 머릿속에 정해진 목적 달성 수단과 도구로서 제품제작에 적용될 수 있고, 어떤 경우 머릿속에 정해질 수 없는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인 오브제Object의 창조일 수 있다. 그는 공예와 예술의 경계선도 바로 위와 같은 식으로 분명하게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공예의 존재론적 특이성은 그것이 하이브리드Hybrid 즉 잡혼성이라는 점이다. 공예는 가시적인 도구의 기능적 속성과 심미(Aesthetic Experience)라는 비가시적인 내재적 가치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만든 제품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상의 실용적 도구라는 기능적 용도가 배제되고 오로지 심미적 가치만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전제된 순수예술의 정의와 달리, 제품의 순수성을 고집하지 않고 순수성과 유용성, 심미성과 도구성을 동시에 포섭하는 공예의 정의는 예술의 정의보다 훨씬 선명하고 쉽다.            

 

자기해체적 예술창조 과정

가능한 세계의 언어적 구성으로서의 예술작품 : 근대적 의미로 사용될 때, 예술이라는 개념은 미학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지적 영역인데 그것은 과학이라는 지적 탐구영역과 구별되는 동시에 실천적 영역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윤리학과도 차별화된다. 이 같은 미학적 탐구영역으로서 예술은 과학의 일차적 관심이 진리 발견에 있고, 윤리학이 선한 행위를 하는 데 반해서, 아름다움의 감상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 문화적 생산품을 지칭한다. 하지만 예술은 일반적으로 재현의 양식 혹은 표현 양식으로 규정되고 예술의 가치는 재현의 정확성과 우아함 또는 거기에 표현된 생각이나 감동의 깊이에 비례해서 감상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언어로서의 예술이 재현 혹은 어떤 감동의 표현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재현, 표현, 아름다움의 개념들은 그 외연外延이 너무 크다. 예술이 필연적으로 재현하거나 표현한다는 사실은, 문자언어이든 비문자 언어이든 예술작품이 일차적으로 일종의 언어로서 인정되어야 하고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언어적 명제로서 예술의 정의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이런 정의는 앞서 말한 예술의 존재론적 독립성 즉 자율성을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적 및 과학적 텍스트, 신호등, 그리고 인간이나 동물의 제스처가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재현하거나 혹은 어떤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한 명제를 예술작품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을 개연적 양상으로 봄을 의미하며, 똑같은 명제를 비예술작품으로 대한다는 것은 단언적 혹은 필연적 양상으로 대함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언어적 담론으로서의 예술작품과 철학, 과학, 종교 등과의 구별은 오로지 그것들 각각의 존재 양상 간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후자의 명제가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의 사실성을 주장하는 데 반해서 전자 즉 예술적 명제는 그러한 진리를 주장하지 않고 오로지 그러한 가능성만을 제안한다. 진리라는 개념은 제안이 아니라 주장에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니 만큼 예술작품 즉 예술적 명제의 진위를 따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술의 아카우스적 운명 : 예술적 충동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물의 궁극적 진리 즉 각기 사물들의 가장 구체적 상황 그대로의 모습으로 파악하려는 인지적 소망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언어의 재현 없이는 어떤 진리의 포착도 가능하지 않는 만큼, 언어 이전에 있는 사실 그대로 사물을 포착하려는 예술적 소망은 태양의 빛을 가지려는 이카루스의 소망처럼 말이 되지 않으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새롭고 독창적인 언어를 창조하려는 예술적 시도는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의 시도처럼 부질없다.

 

이카루스가 태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날개가 녹아서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예술가가 자신의 표상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표상 활동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어적 명제로서 예술작품은 그것이 자신의 것을 포함한 기존의 언어에 대한 비평의 표시이며, 끝없는 언어적 개성을 위한 창조적 활동에서만 비로소 예술작품으로 취급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예술은 본성상 자체 해체적 즉 파괴적이며, 영원한 자체 해체적 과정을 통해서만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뜻으로 아방가르드라고 불리는 특정한 예술운동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필연적으로 아방가르드이다. 예술은 영원한 혁명의 양식 말고는 달리 존재할 수 없다. 혁명적이 아닌 예술작품이란 개념은 근본적으로 자가당착적이다.

 

결론 : 새로운 문명의 구조적 모델로서의 예술 : 서양에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세계를 지배해 온 근대 서구의 과학기술 문명의 몰락 가능성은 생활환경의 약화, 생태계 파괴, 그리고 끊임없이 깊어지는 사회적 및 도덕적 악몽 등에 의해서 날로 더 자명해졌다. 이런 부정적 현상들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정보기술과 생명공학에 의해서 더욱 가속화하고 있는 중이다.

 

이 같은 위기의 원천이 다른 것도 아닌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서구 문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세계에 관한 재개념화, 즉 급진적으로 색다른 철학적 재구성 없이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명사적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세계예술사 전체를 통해서, 특히 현재의 서양예술사를 통해서 드러난 예술의 자기 해체적 특징은 시효를 다해 가는 문명의 석양이 아니라 새로운 먼동을 향하는 징조로 풀이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내재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예술의 자기 갱신적 특징이야말로 세계를 새로 조직하기 위한 최선의 패러다임이며 우리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데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2. 생태

 

생태 위기와 아시아의 사상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인 인간 중심주의 세계관 : 현재 인류가 겪는 생태 위기는 빠른 속도로 발달해온 과학기술 지식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위기를 주로 과학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어떤 사람은 현대의 과학기술과 지식이 서구의 산물이기에, 서구에 오늘날의 환경과 생태 위기의 책임이 있다고도 비난한다. 그런데 서구와 그 외 지역, 특히 동양을 구별하는 기준에는 태도의 차이가 있다. 이런 태도의 차이는 서구의 근대적 합리성과 동양의 미학적 감수성 사이의 차이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서구의 합리성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탈근대의 시기에 과학, 근대성, 합리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서구는 악의 대변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추론 방식이 바로 대부분의 아시아 학자들이 보는 방식이다.

 

현재 인류가 처한 위기와 그 위기의 원인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사유는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오류는 과학기술과 지식이 가진 본성을 잘못 해석한 데서 기인한다. 과학 지식이 합리적인 성격을 띠는 한, 그것이 복잡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도 아니고 그런 지식에 바탕을 둔 기술도 실제 인구 폭발이나 환경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 무분별한 산업화의 원인 제공자가 아니다. 그러나 과학기술, 근대성, 서구 사회 그 어떤 것도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특정한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라고 본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중심주의가 공간적   존재론적 위상의 중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가치론적 차원까지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가치론적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 종만이 가장 가치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즉 이 우주에서 인간만이 가장 가치 존재라고 말하는 이런 태도가 유가적 경전에서 나타나긴 했지만 이 가치론적 인간 중심주의는 전형적인 동양적 사유인 힌두교, 불교 그리고 도교의 경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개념이다.

 

자연 중심의 아시아적 세계관 : 이런 맥락에서 아시아적 세계관은 현재 목전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는 데 사상적으로 귀한 자원이 될 수 있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여기서 전통적인 아시아적 세계관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그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는 있지만, 대략적으로 중국과 인도의 사유를 총칭한다. 인도의 토양에서 자란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중국의 토양에서 태어난 유교와 도교의 세계관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주의적인 데다 나아가 자연에 적대적인 서구 세계관과 달리 자연-생태 중심인 사유체계라고 할 수 있다.

 

결론 : 선택과 행동의 몫은 우리 자신 : 오늘날 인류가 겪는 환경과 생태 위기는 아시아나 서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구촌 차원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이 위기는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모든 차이를 초월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서구의 사유와 아시아적 사유 중 어떤 것이 더 우월한가를 겨루는 문제가 아니고, 과학 문화와 명상 문화 그리고 친환경적 이데올로기와 인간 중심적 이데올로기의 우월성을 가르는 문제도 아니다. 반대로 문명의 위기인 환경과 생태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인류가 앞으로 이 지구상에서 계속해서 생존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자신 외에 그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지구촌에서의 고통과 공생을 위한 인문학

물리적 접촉과 정신적 고통 : 과학지식과 기술의 기하급수적 축적과 역사 전개과정의 단계에서 인간 집단의 단위가 가족에서 부락으로, 도시로, 국가로, 다시 인종적으로, 언어적으로 분산되는 동시에 마침내는 단 하나의 인류공동체로서의 지구촌에 통합되어 왔다. 그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현실에서 인류는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살면서도 그와 동시에 타자와의 갈등, 분쟁, 불안, 폭력, 소외 그리고 고독 등을 겪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이 속한 집단 안에서 다른 구성원과의 순조로운 접촉과 소통을 통한 합의를 도출해야 함을 전제하는데 진정한 합의는 당사자들 간의 마음의 소통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공유하는 가치와 언어를 찾고 개발해야 한다.

 

매체의 기술적 접촉과 마음의 인문적 소통 : 과학의 인식 양식이 그 인식 대상을 양적 차원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데 있다면, 인문학의 인식 양식은 필연적으로 주관적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인문학은 인간의 정신적 생활에 관한 반성적 정보와 인간의 주관적 표현으로서 인간심리학, 미술, 조각,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양식, 문학작품, 패션 등의 총체적 인간 사회의 정서적 표현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들은 한 사회의 지역적, 역사적 환경과 시대에 따라 언제나 가변적인 생활양식, 전통, 풍습의 축적된 총체 즉 문화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문학은 그러한 것들의 인간적, 정신적, 역사적 의미에 관한 주관적 서술방식이기도 하다.

 

인문학은 남녀, 정당, 세대, 민족, 남북, 동아시아 국가, 인종, 동서양, 전통, 언어 등 여러 영역과 문명권간에 존재하는 문화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밝혀내서 서로가 이질적으로 느꼈던 다른 집단의 마음  정서를 그들의 자연, 역사, 사상사, 예술사, 종교적 전통, 문학적 작품 등을 연구하고 그것들의 문화적 의미를 해석하며, 거기서 발견되는 고유성   특수성과 아울러 동일성/보편성을 동시에 인정하고 그것의 문화적, 인간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찾아내는 정신적 창조활동이다. 인문학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에 관한 모든 사유, 활동, 문화적 제품의 총칭이다. 

 

결론 : 소통을 위한 인문학적 구체적 실천 방법 : 소통이 남과의 접촉을 통해 그의 마음과 그가 사는 집단의 문화적 이해를 전제하고, 그러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타자와의 소통과 이해, 공존과 공영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공동체 방문, 그들 나라의 여행, 역사, 사상사, 문학 및 예술 등 다양한 문화적 제품들을 연구하고 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종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이질적일 수 있지만,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인류 집단 안의 동등한 구성원이며 근원적으로는 모든 차이를 초월해서인류라는 이름의 DNA를 공유하고 그에 적합한 가치를 추구하는 신비스럽고도 놀라운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예술적 변용

환경 미학의 모델로서의 예술 작품 : 환경 미학이 근래 미학의 영역에서 중심적인 화제의 하나로서 학문의 마당에 나타났다. 환경 미학에 대한 관심은 두 가지 이유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자꾸만 추해지는 우리의 주거 환경에 대한 자각과, 둘째는 자연과 인종의 생존을 위협하는 생태학적 재난의 개연성이라는 요소다. 그렇다면 환경 미학의 문제는 아름답다는 막연한 뜻으로서 어떻게 우리의 삶의 환경을 미학적으로 만족스럽게 만드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 전반에 걸쳐서 진행되고 있는 생태학적 재앙의 가능성과 어떻게 대처하고 그것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문제 해결의 우선적인 목적은 실천적 목적을 정하고 정당화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데 있다.

 

여기서 환경 미학의 이론적 틀을 단토 식의 표현을 적용하자면, 세계의 예술적 변용을 통해서 실천에 옮겨질 수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의 예술적 변용이라는 말은 예술작품이 이론적 관점으로서의 세계관과 환경 미학의 실천적 프로젝트의 모델   패러다임의 역할을 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경 미학 프로젝트의 철학적, 실천적인 몇 가지 함축적 의미를 유추해서 지금까지 갖고 있던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가치론적 세계관을 혁명적으로 개혁하고 인간의 다양한 과제들 간의 관계를 재조직할 필요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으로 변용된 세계 : 예술작품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지만, 분류적 관점에서 볼 때 언어적 의미와 평가적 가치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갖는다. 예술작품이란 말의 의미는 아주 넓은 뜻으로 규정된 일종의 언어로 정의되며, 그것은 그 자체로서 감상의 대상이 되는 내재적 가치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한편으로 뒤샹의 작품 <샘물>이 지각적으로는 다른 모든 변기들과 구별되지 않지만, 개념 예술가들에 의해서 예술작품으로 취급되어 그렇지 못한 다른 사물이나 사건이나 풍경과 구별되는 예술작품으로 변용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예술작품으로서 그것들이 자연적인 것이라면, 뒤샹의 변기와 그 이외의 변기, 또는 개념 예술가들이 예술작품이라고 부르는 사물, 사건, 풍경들과 다른 일반 사람들의 존재론적 차이를 구성하는 것은 비자연적인 동시에 비지각적 속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은 지성으로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감각을 통해서 감상할 수 있는 언어라는 존재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인지적인 동시에 미학적인 것이다. 원래적으로 하나하나의 모든 예술작품은 인지적인 동시에 미학적으로도 만족스러운 것이 되고자 하며, 위의 두 가지 관점에서 동시에 감상적이 되고자 한다. 만일 진리, 지식, 깨달음 등이 의미론적 기능을 하는 존재로서 예술작품의 인지적 가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언어적 매체로서 예술작품의 미학적 가치 평가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범주 규범들은 조화, 우아함, 우월성 등과 같은 속성들 일 것이다.

 

자연을 예술작품으로 본다는 것은 인간 중심적 목적으로 그것에 상처를 주어 해로운 행위를 하는 것일 수 있고, 그것을 보기 흉하게 만들거나 생태학적 관점에서 반자연적일 수 있으며, 기계적 법칙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착취할 수 있는 단순히 거대한 물질적 대상으로 다룰 수 없게 된다. 오히려 세계는 조화롭게 통일된 실체로서 그 아름다움이 찬양되고 감상되며, 찬양할 수 없이 깊은 우주적   형이상학적 의미가 존중되고 숭배되어야 하는 실체로 나타난다. 예술작품으로 변용된 세계는 인간과 자연, 행위자와 행위 대상자, 유기물과 무기물들은 다같이 어떤 것으로도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로 융합된다.

 

환경 미학에 함축된 철학적  실천적인 것들 : 여기서는 세계의 예술적 변용으로서 기획된 환경 미학 프로젝트 실천의 논리적 결과를 생각해 보자. 환경 미학자들이 세계관의 교체를 통해서 세계를 예술작품으로 변용했을 경우에도 그들은 그렇게 이루어진 예술작품에 더 손질을 해야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환경 미학자는 마치 한편의 시가 완전한 이상적 작품이 되도록 계속해서 손질할 필요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환경의 차원에서 보다 이상적인 예술작품으로 만들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환경 미학의 철학적 토대에 관한 여러 가지 고찰은 우리를 예술적   생태적이라고 이름 붙인 세계관으로 유도한다. 이러한 세계관의 틀 안에서 우리 인간은 세계 예술작품의 구성적 요소인 동시에 그러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이며, 또한 우리를 포함하는 세계는 이미 창조된 예술작품의 일부인 동시에 창조되는 과정에 있는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안에서 만일 환경 미학의 과제에 끝이 있다면 그 끝은 헤겔식 형이상학적 오디세우스적 역정의 끝과 일치할 것이다.        

  
 

Posted by archita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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