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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2011년 1월]



[PLUS 2011년 1월]




[UNStudio, Lecture at Center City from VMSPACE on Vimeo]



Posted by archita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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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사 개 요 ]
데이비드 치퍼필드 건축 전시회 'Form Matters'
일시 : 2011년 3월 5일 - 12일 (10:00~17:00)
장소 : 갤러리 현대-신관
주최 : Organising body, 한국건축가협회
문의 : 02 744 8050 / kia@kia.or.kr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현 시대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 중 하나로, 재료를 세심하게 다루고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여 이를 작품에 담아내는 건축가로 유명하다. 이번 전시는 Form Matters라는 주제로 마련된 전시로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이며, 이탈리아 발렌시아 (Valencia)의 아메리카 컵 빌딩 ’Veles e Vents’와 바르셀로나의 정의의 도시(City of Justice)와 같은 최고의 프로젝트를 포함한 그의 지난 25년간의 작품 활동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는 제임스 시몬 갤러리, 베를린의 뮤지엄 아일랜드(Museum Island)의 새로운 입구 건물과 같은 중요한 공공 설계도 보여줄 예정이다.
이번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전시에서는 런던의 디자인 뮤지엄 (Design Museum)과의 공동 작업에서 전시 Form Matters 전의 작품 중 일부를 선택해 보여지게 된디. 본 전시의 작품들은 런던의 디자인 뮤지엄과 스페인 및 이탈리아의 여러 갤러리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이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치퍼필드의 작업 방법론과 그의 일련의 프로젝트들을 새로운 아카이브모델 및 과거 기록상의 모델, 스케치, 그림, 사진, 그리고 영화를 통해 세심하게 조명한다. 전시는 두 개의 주요 섹션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건축의 결과물들을 형태의 형성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하고, 두 번째는 대표적인 작품들의 관찰을 통해 건축을 구현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펼쳐나가는 복잡하고 기나긴 과정을 보여준다.

런던의 킹스턴 예술 대학교(Kingston School of Art)와 건축협회(Architectural Association)에서 수학하고,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gers)와 노만 포스터(Norman Foster)의 사무실에서 경력을 쌓은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1984년 런던에 자신의 건축 회사를 설립한다. 치퍼필드는 자신의 영국을 넘어 유럽 본토까지 활동 무대를 넓혔으며, 이곳에서 그는 문체론(stylistics)이나 매너리즘(mannerism)을 뛰어넘어 작품에 진정성과 지적인 야망을 불어넣은 일단의 건축가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오늘날 유럽과 중국, 일본, 미국, 멕시코 및 한국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다. 연륜이 느껴지는 데이비드 치퍼필드 건축은 자신만의 고유한 매력을 발산한다. 다양한 재료들간의 결합속에서 만들어지는 그의 건축들의 매끄러운 조화는 아름다움과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들은 화려하고 극적인 방식보다 절묘하고 은은함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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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rchita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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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밖에서 지켜본 저자는 뭔가 모를 물음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대하는 그의 모습에서 선생의 모습과 진지함을 배웠다.
진심으로 대하는 그의 마음이 전해져서 였을까? 학생들의 마음은 그를 향해 항상 열려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도서관에서 잠시 만났을 때 책을 보는 모습을 격려하던 모습과
대학원진학을 놓고 고민할 때 일각의 주저없이 대학원에 꼭 오라는 당부의 말이
마음 한켠에 자리잡았다. 

혹자는 그를 천재라 평하고, 자신의 뒤를 이을 유일한 사람이라 말하기도하며
때로는 그의 모습속엔 숨겨진 계산과 관리의 면모가 있다고도 한다.

글에 대한 관심이야 말할 것도 없고,
글을 통해 그에 대해 조금 더 가까이 가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물론 내용이 쉬 이해해서 온전히 소화하기엔 그리 쉽진 않음을 알기에 
덜컥 겁부터 나기도 하지만 01권에 이어 나온 02권을 이제 손에 쥐었으니 
다시 또 시작이다. 
연이어 나올 03/04권에 대한 기대도 잊지 않는다. 
 

Posted by archita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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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이야기

아서 단토 지음

명진출판 / 20108/ 248/ 12,000

 

저자 아서 단토(Arthur C. Danto)

미국의 원로 미술평론가이며 예술철학자이다. 젊은 날엔 화가로 활동하다 예술철학을 공부해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오랜 시간 일했다. 1960년대 당시 뉴욕에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앤디 워홀의 작품을 처음 보았고, 그에 매료되어 워홀의 의미와 그 세계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해왔다. 컬럼비아 대학 종신교수로 있었으며 퇴임 후 현재는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역자 박선령

세종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MBC방송문화원 영상번역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번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위대한 작가들의 은밀한 사생활, 설득의 비밀, 아빠와 함께 프로젝트, 영감으로 이끄는 리더경영, 키싱스쿨외 다수가 있다.

 


Short Summary

동유럽 슬로바키아에서 온 이민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류머티즘 무도병을 앓으며 병약한 유년시절을 보낸 앤디 워홀. 유년시절 그림도구와 사진기를 친구 삼아 놀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나간 끝에 광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해 카네기 공과대학에 입학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으로 가서 잡지 일러스트나 광고 등 상업적인 디자인 작업을 주로 했으며 이 분야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그 후 상업미술을 접고 순수미술로 진출하여 새로운 작품 세계를 창출해냈다. 주로 농담 같은 그림을 그려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는 <팝 아트>의 대가로 예술사에 기록된다.

 

살아 있는 동안 수많은 논란과 화제를 몰고 다녔던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은 스스로를 예술 공장 공장장으로 부르며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수고 일상과 예술과 상업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팩토리(공장)’라 이름 붙인 그의 작업실에서 코카콜라 병이나 수프 캔, 꽃 등 일상적이고 상업적인 제품은 예술작품이 되었고, 각계각층의 온갖 평범한 사람들은 스타로 변신되었으며 대중 스타와 금기의 인물들은 평범하고 친근한 존재로 재창조되었다.

 

이렇듯 예술과 창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 그를 단지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묶어두고 바라보기엔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그는 21세기가 가장 원하는 인재형이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컨버전스(여러 기술이나 성능이 하나로 융합되거나 합쳐지는 일)‘21세기를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라면 워홀의 세계는 그 두 가지가 온전히 살아 움직이는 곳이다. ‘멀티 플레이어 창조인앤디 워홀은 문화예술을 꿈꾸는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21세기 창조적 인재의 롤모델을 제시해준다.

 

 

 

차례

프롤로그 - 20세기를 살다 간 워홀은 21세기가 원하는 창조적 인재의 원형이었다

 

1. 그림을 그리며 병을 이겨낸 아이

그림도 좋고 영화도 좋아

카네기 공과대학에 들어가다

백화점에서 일하며 상업미술에 접근하다

 

2. 예술가들이 모이는 뉴욕으로 가다

훗날 대가가 된 필립 펄스타인과 함께 뉴욕으로

대중문화의 수도 뉴욕

상업예술가로 성공하다

 

3.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벽을 허물다

농담 같은 그림

다른 화가들과 차별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릴 거야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하다

흔해빠진 수프 캔을 그리다

예술적 성과를 한 단계 높인 재난 시리즈

 

4. 예술사에 기록될 팝아트의 선두가 되다

팝아트란 무엇인가

예술 공장 공장장

예술가에서 시대의 문화 아이콘으로

 

5. 모든 예술은 통한다

워홀이 만들면 영화도 달라

뜻하지 않게 총상을 입다

주문 초상화를 그리다

잡지 인터뷰를 발간하다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 유명해질 것이다

 

6. 삶을 예술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사람

마오시리즈라는 특별한 작품

고전작품을 현대로 부활시키다

망치와 낫을 작품화하다

비즈니스 아티스트 앤디 워홀

 

에필로그 - 앤디 워홀의 가장 위대한 조력자, 어머니의 힘

앤디 워홀이 걸어온 길


 

1. 그림을 그리며 병을 이겨낸 아이


그림도 좋고 영화도 좋아

소년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연필과 스케치북: 초등학교 3학년. 열 살이 된 앤디는 여름방학 내내 아파서 침대 생활을 하며 지냈다. 바로 류머티즘열이 발생한 후에 나타나는 무도병때문이었다. 이 병은 운동신경 체계에 일시적으로 장애가 생기는 것으로,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발작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이 아파도 앤디의 손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림 그리는 연필과 스케치북이었다. 그의 뛰어난 드로잉(소묘) 실력은 어릴 때부터 이런 자발적인 연습을 통해 만들어졌다.

 

앤디는 미술 분야 외에 무척 좋아하는 것이 또 있었다. 영화배우들과 만화였다. 앤디의 어머니는 그런 앤디에게 필름 프로젝터까지 사주며 단편 영화와 만화를 보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홉 살 때는 처음으로 카메라를 사주어 사진 찍기에 관심을 갖게 했으며, 집 지하실에 임시로 암실을 만들어 직접 필름을 현상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이 어쩌면 앤디의 예술성을 일찌감치 키워준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도 아닌 1930년대 중반에 아이가 필름 프로젝터와 카메라를 직접 사용하며 놀았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시대를 앞서고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앤디 워홀의 예술적 성향이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앤디 워홀(본래는 앤드루 워홀라였는데, 나중에 미국식 이름인 앤디 워홀로 바꾸었음)192886일에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맥키스포트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온드레이 워홀라와 어머니 줄리아 주스티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트란스카파디안 지방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 1세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앤디네 집안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민자 거주지인 도시의 소외된 빈민 지역에서 앤디는 의기소침하고 소심한 소년으로 자랐다. 그런 앤디에게 그림 그리기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림 그리는 것이 가장 즐거운 놀이였다.

 

카네기 공과대학에 들어가다

미술교사보다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어: 홈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스켄리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앤디 워홀의 미술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었다. 워홀은 194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가난한 형편이지만 대학에 진학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워홀은 대학 진학 문제를 고민하다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광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려면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카네기 공과대학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네가 정말 좋아하는 학과를 선택하렴.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야.” 어머니는 워홀의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워홀은 카네기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산업디자인과에서 다루는 것은 주로 삽화와 광고 디자인이었지만, 워홀은 예술사 등 교양 과목을 공부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워홀의 대학 시절에서 주의를 끌 만한 특별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후에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로 성공한 필립 펄스타인과의 우정이다. 워홀과 펄스타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알아보았다. 그 열정에 이끌려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워홀조차도 펄스타인과는 마음을 터놓고 지냈다.

 

백화점에서 일하며 상업미술에 접하다

딱 맞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 형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기가 부담스러워진 워홀은 스스로 돈을 벌면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나서야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방학 때였다. 워홀은 피츠버그에 있는 조지프 혼 백화점을 찾아가서 볼머라는 사람을 만났다. “제가 이 백화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저는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습니다.”그는 워홀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그림을 잘 그립니다. 특히 드로잉과 페인팅은 자신 있습니다.”“좋아. 그렇지 않아도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놓을 새로운 사람이 필요했네. 난 뉴욕에서 왔는데, 여기는 참신함이 부족해. 새로움이 필요하지.”그가 뉴욕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 워홀은 더욱더 그곳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그 당시 뉴욕은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동경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뉴욕에 대한 동경이 시작되고: 워홀은 볼머가 내민 패션 잡지 보그하퍼스바자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해 여름 내내 워홀은 보그하퍼스바자, 그리고 유럽의 패션 잡지들을 훑어보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보고 고민하다보면 밤을 꼬박 새기도 했지만, 그는 흥분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시간을 즐겼다.

 


2
. 예술가들이 모이는 뉴욕으로 가다

 

훗날 대가가 된 필립 펄스타인과 함께 뉴욕으로

마음은 벌써 뉴욕에 가 있어: 1949년에 워홀은 카네기 공과대학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예술학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에 대한 동경과 그곳에서 미술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열정을 아는 펄스타인이 워홀에게 뉴욕으로 가자고 했다. 두 사람은 각각 200달러씩 들고 피츠버그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에 도착한 두 사람은 뉴욕의 남동쪽에 있는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에 작업실을 얻어 함께 지냈다. 이곳은 뉴욕 문학과 음악의 원천이었고, 그 후 1980년대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 벽이나 다양한 화면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처럼 긁는 그림)의 발상지가 된 곳이었다.

 

멋진 가게들이 있는 5번가, 광고업의 중심이자 상업예술이 꽃피고 있는 매디슨 애비뉴, 고급 아파트 지역인 파크 애비뉴 등은 그의 꿈과 욕망을 자극했다. 뉴욕은 그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욕망들을 하나하나 펼쳐보고 이룰 수 있는 꿈의 도시였다.

 

일자리를 찾아서: 하루는 패션 잡지인 글래머를 발행하는 잡지사를 찾아 갔다. 그곳의 아트 디렉터였던 티나 프레더릭은 워홀의 포트폴리오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굉장하군요. 전율이 느껴져요. 하지만 우리가 필요한 드로잉은 상업적인 이미지예요. 특히 우리 잡지에 필요한 것은 구두 드로잉뿐이에요.”그녀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워홀은 밤새도록 구두 드로잉을 그렸다. 그리고 다음날, 50장의 구두 드로잉을 종이봉투에 담아 들고 다시 프레더릭을 찾아갔다. 그녀는 워홀의 열정과 재능에 탄복했다. “놀랍군요! 하룻밤 만에 이렇게 많은 드로잉을 그려내다니. 게다가 대부분 괜찮은 것들이군요. 좋아요. 우리 잡지사에서 프리랜서(자유계약에 의해 일하는 사람)로 일해봐요.”

프레더릭에게 드로잉 실력을 인정받은 워홀은 글래머의 삽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가 맡은 첫 번째 작업은 <성공은 뉴욕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에세이에 들어갈 삽화였다. 그런데 그 에세이의 제목이 신기하게도 워홀의 성공을 예견한 듯 했고, 그래서인지 삽화를 그리면서 그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대중문화의 수도 뉴욕

예술가의 심장이 뛰는 곳: 뉴욕이 문화· 예술의 도시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이곳에 유럽의 예술적 대가들이 많이 이주해왔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급속히 세력을 키운 사회주의 정부가 이념이 맞지 않는 예술가들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수많은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예술) 예술가들은 자기 나라에서 마음껏 예술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좀 더 활동하기 편한 미국으로 와서 그들의 예술적 열정을 꽃피웠다. 이들은 주로 뉴욕에서 정착해서 활동했는데, 그들 중 막스 에른스트, 마르셀 뒤샹, 마르크 샤갈, 이브 탕기 등이 미국의 모던 아트(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한편으론 유럽의 예술가들이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 당시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같은 젊은 화가들이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거론되었으며, 뉴욕 스쿨 1세들의 추상표현주의는 자랑스러운 미국의 모던 아트로서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이러한 현상은 많은 예술가 지망생들이 뉴욕에 와서 활동하고 싶어지는 이유가 되었고, 워홀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술혼의 발전소 그리니치빌리지: 뉴욕의 여러 지역들 중에서 예술가들이 모여 생활하면서 문화 반란의 중심이 된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그리니치빌리지이다. 이곳에는 카페와 찻집, 화랑, 극장, 서점 등이 줄지어 서있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을 좋아해 하나둘씩 모여 살기 시작했다. 전위예술가, 화가, 작가,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동성연애자, 자유연애자 등 기성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어울리며 한데 뭉친 것이다.

 

1961년은 뉴욕에서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룬 해였다. 짐 다인이 마사 잭슨 화랑에서 아상블라주(Assemblage, 폐품이나 일용품을 비롯해 여러 물체를 한데 모아 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기법 및 작품) 작품을 전시했고, 톰 웨슬먼의 <그레이트 아메리칸 누드>가 타나제 화랑에 전시되었다. 또 클래스 올덴버그는 자신의 작업실에 아주 크게 만든 생활소품들을 전시했으며,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 장면을 이용한 작품을 전시했다. 이러한 모든 활동을 의미하는 용어가 으로, ‘은 터진다는 의미 외에 인기 있다는 뜻도 있다.

 

상업예술가로 성공하다

첫 번째 상업미술 전시회: 1952년 여름이었다. 소설책을 읽던 워홀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작가에게 반했어. 이 작가를 위해 내가 그림을 그려야겠어.”워홀이 읽은 소설은 트루먼 커포티가 쓴 다른 목소리, 다른 방들이었다. 워홀은 소설뿐만 아니라 소설책 표지에 실린 커포티의 사진을 보고 반했고, 그를 위한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했다. 워홀은 드디어 1952616일부터 73일까지 뉴욕의 휴고 화랑에서 <앤디 워홀: 트루먼 커포티의 글에 기반을 둔 열다섯 개의 드로잉>전을 개최했다. 그의 첫 번째 전시회였다.

 


3
.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벽을 허물다

 

농담 같은 그림

상업미술의 성공을 과감히 접다: 1960년 초에 워홀은 확고한 결심을 했다. 상업적 드로잉을 그만두고 순수미술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렇게 꾸준히 순수미술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던 시기에 워홀에게 힘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에밀드 안토니오였다. 워홀은 안토니오를 라는 애칭으로만 불렀다. 워홀은 디를 믿고 존경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미술을 향한 자신의 행보에 대해 디가 충고하거나 조언해주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면 디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고 그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어느 날 디가 워홀을 방문했다. 워홀은 디에게 막 완성한 두 점의 그림을 가져와 디가 잘 볼 수 있도록 벽에 기대어놓았다. 그림을 보여줄 때 워홀은 디가 입을 열 때까지 절대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봐, 앤디! 이 그림은 개똥같아. 여러 요소들이 한데 섞여 있어서 보잘것없어. 저건 괜찮은 것 같은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같고 우리 자신 같기도 하고, 아름답고 적나라해 보여. 그러니 이건 갖다 버리고, 저건 출품하도록 해.” 디가 칭찬한 흑백의 코카콜라 병 그림은 나중에 팝아트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그림이 되었다.

 

코카콜라 병을 선택한 예술철학: 순수미술을 하겠다고 결심한 워홀이 코카콜라 병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그의 특별한 예술철학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코카콜라 병을 예술의 세계로 끌어들이면서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선을 허물고 싶었다. 또한 특정 계층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예술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화가들과 차별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릴 거야

내가 미치려면 무조건 새로워야 해: 워홀이 순수미술 작업을 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미학적 측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이 얼마나 새로운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특히 자신의 그림이 다른 사람의 그림과 비슷한 것을 싫어했다. 그가 화랑들을 자주 방문해 최근의 그림들을 살펴본 이유는, 단지 인맥을 쌓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화랑에 전시된 그림들 중에 자신이 그리고 있거나 구상하고 있는 그림과 비슷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그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신선한 충격을 주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였다.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하다

무엇이든 남이 안 하는 기법을 원해: 워홀하면 떠오르는 것이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스타들의 그림과 수프 통조림 그림, 코카콜라 병 그림 등이다. 이러한 그림들은 모두 실크스크린이라는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워홀이 순수미술에 사용한 제작기법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마치 워홀의 전매특허처럼 여겨지는 실크스크린 기법이다.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처음 작업을 한 것은 1962년이었다. 실크스크린 기법은 손으로 그리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워홀이 추상표현주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한 결정적 수단이 되었다. 실크스크린으로 작업을 하면 기계적인 정확함과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워홀이 생각해낸 새로운 작품 세계였다.

 

예술적 성과를 한 단계 높인 재난 시리즈

이번에도 남과 다른 발상을: 196264, 워홀은 헨리 겔달러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 앞에는 신문이 펼쳐져 있었는데, 비행기 추락 사고로 129명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 사고를 작품으로 다루면 어떨까? 우리 주변에서 항상 일어나는 재난들, 작품 소재로 쓸 만하지 않아?”워홀은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작품 소재에 대한 아이디어를 묻기도 하고, 그들이 제안한 것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그려왔다. 그 후 탄생한 작품이 <129명 사망>이며, 이 작품을 시작으로 워홀의 재난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재난은 현대인의 일상에 숨어 있는 거야 <129명 사망>으로 시작된 재난 시리즈는 <시각적 차사고>, <오렌지색 5명의 죽음>, <붉은빛의 인종 폭동>, <라벤더빛 재난(전기의자)>, <13명의 지명 수배자> 등으로 이어지고, 1965년의 <원자폭탄>까지 이어진다. 워홀은 <원자폭탄>에서 인류의 자멸을 경고했다. 이러한 재난 시리즈는 그의 작품에 더욱더 선명한 예술적 가치를 부여했다.

 


4
. 예술사에 기록될 팝아트의 선두가 되다

 

팝아트란 무엇인가

좋은 취향나쁜 취향의 경계선을 허물다: 팝아트라는 말은 1958년에 영국의 평론가 로렌스 앨로웨이Lawrence Alloway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원래는 미국의 대중매체가 주도하는 대중문화, 특히 할리우드 영화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앨로웨이는 공상과학 소설이 그랬듯이 팝아트도 예술영화나 순수문학, 엘리트 문화의 산물처럼 진지하게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와 차이가 생기면서, 상업문화에 등장한 물건과 이미지 또는 그 사용법이나 의미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해당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을 그린 그림과 조각만 의미하게 되었다.

 

팝아트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앤디 워홀의 작품에 대한 평가와 일치하는 것이 있다. ‘비딩턴Bidding.com’이라는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팝아트에 대한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 팝아트는 소비사회와 대중문화의 이미저리Imagery와 기술들을 활용했던 20세기 예술운동이다.1950년대 후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고,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전성기이다. 팝아트는 형상을 주로 하는 이미저리와 캠벨 수프 캔, 4단 만화, 광고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늘 보는 대상들을 재생한다. 이 운동은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을 좋은 취향나쁜 취향이라고 구분을 짓던 경계선을 허물었다. -

 

예술 공장 공장장

작업실을 팩토리라 이름 붙인 재치: 1964년 워홀은 맨해튼 남쪽 이스트 47번가의 건물 꼭대기 층을 빌려 작업실을 새롭게 단장했다. 몇 개의 거울과 스크린으로 된 칸막이만 빼놓고, 400제곱미터나 되는 공간을 모두 터버렸다. 그리고 모든 파이프와 창문, 천장과 깨진 벽돌 벽을 은박지로 둘러쌓다. 은박지로 쌀 수 없는 바닥이나 캐비닛과 전화기는 은색으로 칠했다. 심지어 화장실과 변기 속까지 은색으로 칠했다. 그리고 천장에는 무도회장에서나 볼 수 있는 다면체의 조명을 매달았다. 그 조명은 천천히 돌면서 어두운 공간 전체에 불규칙한 빛을 반사했다. 워홀은 자신이 만든 이 특별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라고 이름 짓는 재치를 발휘했다. 작품의 소재를 지극히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것에서 선택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기존의 생각을 뒤집었다. 마치 공장에서 공산품을 찍어내듯 만들어낸다는 의미였다. 워홀은 예술 공장의 공장장으로서 마치 공장에서 모자를 생산해내듯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것은 개성이 없는 똑같은 모자가 아니라, 워홀만의 독특한 예술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활용해서 다시 창조적 과정을 거친 예술 작품들로 탈바꿈시키곤 했다.

 

예술가에서 시대의 문화 아이콘으로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던지기: 1964421일부터 59일까지 일레노와드의 스테이블 화랑에서 워홀의 두 번째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를 찾아온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화랑이 아니라 슈퍼마켓이나 식료품 창고에 와 있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화랑에 전시된 미술품들은 워홀이 만든 브릴로 상자 등 잡화점 상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뒤샹과 같은 행위잖아. 이미 만들어진 것을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 말이야.”“하지만 뒤샹은 이미 만들어진 물건에 사인만 한 채 예술품이라고 주장했지. 앤디 워홀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선택해서 재창조했어. 그것도 대량으로 말이야. 그 차이점이 바로 팝아트의 특징이자 앤디 워홀의 예술철학이지.”사람들은 워홀의 작품을 놓고 자신의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워홀은 디자인 면에서 브릴로 상자보다 훨씬 특징이 없는 켈로그 콘플레이크 상자 같은 것으로도 조형 작업을 해냈다. <브릴로 상자>뿐만 아니라 여덟 가지 종류의 다른 상자들이 조형예술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브릴로 상자>는 예술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인다. 워홀이 이룩한 업적이 바로 이런 것이며, 그는 자신이 만든 작품들이 미국 문화의 아이콘이 되게 하는 동시에 자신도 미국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워홀은 작품의 소재와 제작 과정, 그리고 작품에 대한 철학적 의미부여 등 모든 면에서 기존의 생각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작업 과정, 작품을 만드는 그 자신조차 새로운 예술관의 탄생에 기여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여러 팝아트 작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팝아트의 선두주자가 되었던 것이다.

 


5
. 모든 예술은 통한다

 

워홀이 만들면 영화도 달라

언더그라운드 영화 운동에 매료되다: 1963년부터 워홀은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아방가르드 영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영화배우이자 제작자인 잭 스미스를 만나고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을 더욱 키워갔다. 워홀이 처음 만든 영화에는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성행위를 하는 등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런 활동들이 그가 지금껏 그리던 주제와 소재(수프 캔, 덧문, 냉장고, 잡화점 상자 등)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다 아는 일의 순수한 매력에 주목했던 워홀은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하는일들을 아무런 연출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필름에 담아냈다.

 

주문 초상화를 그리다

초상화도 그의 손을 거치면 예술이다 워홀의 작품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초상화이다. 물론 워홀이 그린 초상화는 모델을 앉혀놓고 유화로 캔버스에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워홀은 초상화도 사진을 보고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해서 작품을 완성했다. 그의 초상화 작품에는 영화배우나 가수 등 스타들과 유명인사들의 초상화가 많았다. 그중 마릴린 먼로의 초상화는 워홀의 예술철학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마릴린 먼로는 페루스 화랑에서 열린 워홀의 전시회가 끝나던 날에 자살했다.

 

현실을 개척하는 특별한 기질: 1970년대에 들어서자 연예계의 스타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유명 인사나 부자들도 워홀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독일의 총리 빌리 브란트,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 피아트자동차 회장 조반니 아그넬리 등이 있다. 이처럼 스스로 초상화를 의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워홀이 직접 초상화를 의뢰할 사람들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이 점이 또 워홀의 특징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가 초상화 작업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 중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벌어들이는 수입이 전체 소득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술 행위를 경제적 활동으로 여기는 것을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그와 달리 워홀은 예술 활동도 당연히 돈을 버는 일이어야 하며, 돈은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시회를 위한 작업을 할 때도 그의 작업실 한편에는 항상 작업 중이던 초상화가 있었다. 그는 친구들이나 미술품 거래상들, 그리고 팩토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누구든 초상화 의뢰를 받아오면 수수료를 주었다.

 

잡지 인터뷰를 발간하다

남이 안하는 스타일의 잡지를 원해: 워홀이 잡지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잡지를 통해 자신의 영화를 알리고, 한편으로 스타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더 있는데, 늘 인터뷰를 당하던 스타들이 거꾸로 워홀 자신을 인터뷰해주기를 바랐다. 그런 시도는 지금까지의 잡지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과 새롭게 만나거나 알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잡지에 실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종종 그가 제작하는 초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6
. 삶을 예술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사람

 

<마오> 시리즈라는 특별한 작품

<마오> 시리즈로 또 한 번 충격을 선사하다: 19722월에 마오쩌둥은 닉슨 대통령에게 중국을 방문해달라고 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냉전 완화를 위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다. 뱃심 좋게 이런 여정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완고한 반공주의자로 유명한 사람뿐이었다. 워홀은 세계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이 두 사람의 초상화를 모두 그렸다. 그가 그린 닉슨은 녹색 피부에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내고 있고, 그 아래에는 맥거번에게 한 표를!’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오Mao> 그림에는 매우 친숙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인자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통한 워홀의 마지막 변신은 매우 놀라웠다. 워홀은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정치가의 이미지 중에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독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워홀이 작품 제작에 사용하기 전까지 마오쩌둥의 사진을 걸어놓은 것은 결코 그의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워홀은 이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정치적 이미지를 누가 봐도 안심할 수 있는 화사한 이미지로 바꾸어 놓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누구나 다른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하거나 사회 체제를 뒤집어엎을 거라는 느낌을 풍기지 않으면서도 <마오>의 초상화를 걸어놓을 수 있게 된 것도 워홀의 창작품이 가져다준 특혜일 것이다. 워홀은 우리 시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특별한 창작자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고전작품을 현대로 부활시키다

이번에는 고전이야!: 워홀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업한 대형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바탕으로 한 회화 작품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워홀의 종교성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워홀이 다빈치의 그림을 원본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누구나 다반치의 그림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최후의 만찬>도 다른 작품을 다룰 때와 같은 방식으로 다루었다. 수프 캔이나 달러 지폐를 시리즈로 그린 것처럼 <최후의 만찬>도 여러 가지 버전으로 만든 것이다. 마릴린과 엘비스의 얼굴을 두 개씩 그린 것처럼 예수도 두 명으로 늘렸다. 반복은 중요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을 표현하기 위해 도브Dove 비누 같은 제품 로고로 그 안을 채우거나, 친숙한 포테이토칩 포장지에 나오는 슬기로운 올빼미를 이용해 지혜를 나타내기도 했다. 빛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GE(General Electric)’라는 로고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상업 분야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그중에 종교적 중요성을 띠는 것은 특별히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비즈니스 아티스트 앤디 워홀

나는 돈에 의연한 척하기 싫어: 1975년에 출간된 앤디 워홀의 철학 : 팝아트의 거장이 쓴 자전적 에세이는 워홀이 자신의 예술과 돈과 명예에 대한 생각을 적은 책이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적었다. 이 책에는 부와 성공에 대한 그의 집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며, 워홀이 비즈니스 예술가라는 것을 스스로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비즈니스 예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비즈니스 예술은 예술 다음에 오는 단계이다. 나는 상업 미술가로 이 일을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비즈니스 예술가로 끝마치고 싶다. 가장 매혹적인 예술은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을 잘하는 것도 예술이며, 성공적인 사업은 최고의 예술이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예술가: 최고의 예술이라고 생각한사업에서도 성공하고 싶었던 워홀은 1987년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19872월 첫째 주, <최후의 만찬> 전시회가 있었던 밀라노에서 돌아온 그는 갑자기 배가 아파 병원에 입원한다. 수술은 3시간 이상 진행되었고, 워홀의 몸에서 쓸개를 제거했다. 1987222일 새벽, 간호사가 그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의 얼굴은 파랗게 변해 있었다. 워홀의 사망 소식은 곧 친구들과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장례식은 1987226일에 비잔틴 가톨릭교회에서 거행되었다. 팝아트의 수장 자리에 앉아 있던 슈퍼스타 앤디 워홀은 이렇게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의 나이 쉰아홉 살이었다.

 

단돈 200달러를 가지고 피츠버그에서 뉴욕으로 왔던 워홀은 38년 만에 어마어마한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비즈니스 예술가임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워홀이 사망한 지 8년 뒤에 개관한 앤디 워홀 미술관은 40여 년에 걸친 워홀의 행보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는 8,000여 점에 달하는 유화, 드로잉, 인쇄물, 영화, 사진, 조형작품, 설치예술을 비롯해 쿠키 통 같은 개인 소장품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워홀이 자신의 해프닝 예술에 참여시켰던 벨벳언더그라운드밴드는 1990년에 워홀을 기리는 헌정 앨범을 제작했다. 제목이 <드렐라를 위한 노래>였다. 드렐라는 그들이 지은 워홀의 별명으로, ‘드라큘라신데렐라의 합성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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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생태』

LIBRARY 2011. 2. 24. 04:02


예술과 생태

박이문 지음

미다스북스 / 2010 12 / 363 / 18,000

 

저자 박이문

1930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불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대 불문과 전임강사를 하던 중 조국을 떠나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등지에서 30여 년 동안 지적 탐구의 교편생활을 한 후 귀국하여 포항공대에서 철학을 강의하다 정년퇴임한 뒤 현재는 시몬즈 대학과 포항공대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희수를 넘긴 지금은 인생을 갈무리하며 철학적 저작 집필에 몰두하는 한편, 시인으로서 마지막 창작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한편 100여권에 이르는 저서로 시와 과학,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상학과 분석철학, 노장사상, 명상의 공간, 문학과 철학, 문명의 위기와 문화적 전환, 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 나의 출가,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둥지의 철학 등의 예술, 미학, 철학적 저작과 인문교양서, 그리고 시집 눈에 덮인 촬스강변, 나비의 꿈,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 울림의 공백, 고아로 자란 코끼리의 분노, 영어 시집 Broken Words, Zerbrochne Worter 등이 있다.

 

이번에 펴내는 예술미학에 관한 인문철학서인예술과 생태 - 우리시대 철학적 지성의 예술미학 강의 21세기 환경에 대한 생태학적 고발과 심미안이 담긴 시집고아로 자란 코끼리의 분노는 최근 그의 사상적 거점과 창작적 방향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Short Summary

과학이 비춰주는 세계는 한계가 있다. 과학의 빛은 오로지 이미 존재하는 물리 현상에만 국한된다. 과학적 앎은 한계를 의식한다. 물질 현상을 넘어서, 그 이전의 세계는 과학으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놓여 있고, 그것은 과학의 빛이 미치지 못하는 어둠으로 남아 있다. 사물 현상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자연 현상이 존재하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떠한 상상도 미치지 못하는 무한한 공간, 무한한 시간, 아니 공간과 시간의 의미가 무의미해지는 자리에서 천당과 지옥, 영생과 종생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이처럼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는 이른바 해탈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해탈이냐? 그러한 해탈은 결국 구체적인 우리의 이 시시한, 너절한 삶을 얼룩지게 하는 희로애락에 대한 의미를 밝혀주고, 살과 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시간과 공간에 매어 있는 이 하잘것없는 삶의 문제들을 풀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그리고 우리는, 아니 인류는, 끊임없는 희망과 좌절, 의미와 무의미의 애매한 중간 지역에서 헛될지 모르지만 애를 쓰고, 착각일지 모르지만 주장하고, 질지 모르지만 투쟁하고, 배반당할지 모르지만 사랑한다. 어둠과 빛의 중간 지역에서 우리는 모르지만 알려 하고, 쓰러지지만 다시 일어나고, 결국은 죽지만 살려고 한다. 여기에 담은 글은 거의 모두 지난 10여 년 동안 학회나 특강을 위해서 국제적 및 국내적 학회에서 영어 또는 한국말로 발표했던 논문들 가운데서 예술과 생태문제에 관련된 18개를 모은 것이다. 

 

차례

프롤로그 - 어둠과 빛

 

1. 예술

1. 미학과 예술철학

2.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사

3. 예술의 원형으로서의 공예

4. 둥지의 건축학

5. 예술이라는 언어의 꿈

6. 시의 개념과 시적 둥지

7. 시인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

8. 시적 혁명

9. 자기해체적 예술창조 과정

 

2. 생태

10. 생태학적 합리성과 아시아 철학

11. 지구촌, 동아시아 공동체 그리고 문학의 역할

12. 지구촌 시대의 문화 비전

13. 생태 위기와 아시아의 사상

14. 생태 위기와 아시아 생태문화

15. 지구촌에서의 고통과 공생을 위한 인문학

16. 환경 윤리의 철학적 초석

17. 생명의 존엄성과 윤리적 선택

18. 세계의 예술적 변용

 

후기

 

  

1. 예술

 

미학과 예술철학

미학과 예술학 : 학문적 범주로서 예술학(Studies on Art)은 미학(Aesthetics)의 일부일 수 있지만 미학은 예술학의 일부가 아니다. 예술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이 반드시 미적 존재가 아니며, 미적 존재가 반드시 예술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 는 감각적 경험의 한 속성이지만, 그 자체는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예술은 자연적 혹은 문화적 사물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각적 대상, 사건, 내면적 경험 등을 지칭하는 일종의 기호언어라는 것이 그 의미 해석 및 가치평가이다.

 

미학의 문제 :  는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떤 상태에 대해서 갖는 경험 내용을 서술하는 하나의 범주다. 즉 지적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감각 대상을 대할 때 경험하는 주관적인 심리 내용의 한 양상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때,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을 지칭하는가, 즉 어떤 대상이 어떤 경우에 아름답다고 서술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일종의 심리학이다. 예술이 미학의 일부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예술만이 미학의 대상은 아니다. 예술이라는 개념은 , 혹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과 동일하지 않다. 예술사가 미학사가 될 수 있지만 예술사가 곧 미학사는 아니며, 미학사가 곧 예술사는 아니다.

 

아름다움이 그 자체를 보편적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간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특정한 심리현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이 지칭하는 구체적인 경험 대상이나 경험 내용은 개인이나 집단, 연령이나 시대에 따라 가변적이다. 미학 또한 인간의 자연, 사회, 시대, 문화, 역사 등 구체적 조건들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리탐구로서 미학은 생물학, 사회학, 인류학, 문화과학, 역사학 탐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와 같은 탐구가 곧 미학은 아니다.

 

예술의 문제 : 의 범주가 위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적으로의 범주에 속하는 것과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 동일시되어 왔고 따라서 두 가지 범주에 속하는 것들의 문제가 동일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혼동은 일반 대중뿐 아니라 전문 예술가, 예술철학을 한다는 이들에게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미학의 문제와 예술의 문제는 사뭇 다르며 그것들의 경험   과학적 즉 실증적 문제와 철학적 문제에서도 각기 그 차원이 다르다.

 

예술작품을 둘러싸고 이와 같은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은 그러한 문제에 관한 대답이 궁극적으로 애매모호하거나 모두가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시비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예술가나 예술작품의 대중적 관람자들 간은 물론 예술비평가, 예술사가 그리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하이데거, 단토와 같은 예술철학자들 간에도 다같이 공감할 수 있는 대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둘러싼 위와 같은 문제는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보편적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모든 것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대상의 존재를 전제하고, 존재의 전제가 그러한 대상의 개념을 전제한다면 예술에 관한 문제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 중에서 가장 인과적이며 근원적이고 논리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술이란 개념 규정이다. 개념 규정은 곧 철학적 활동의 핵심 기능이다. 예술의 철학적 규정 즉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전제하지 않고는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은 겉돌 뿐이다. 다른 종류의 인식 대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예술의 경우도 의미 있는 담론은 개념 규정에서 시작해야 하고 개념 규정에서 끝나야 한다.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사

존재론적 정지  소멸  죽음으로서의 종말 : 종말이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존재론적, 인식론적 의미로 사용된다. 종말이라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관념은 종교적, 철학적, 과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의 의식 속에 깊이 존재해 왔다. 그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힌두   불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무와 공의 형이상학적 사상,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깔려 있는 종말론적 세계관에서 나타난 이래 아직도 세계 인구의 절대 다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식론적 부적절성   오류  무효성으로서의 종말 : 벨팅과 단토(예술철학자이자 예술평론가) 이전에는 종말이라는 개념이 한결같이 존재론적 정지   죽음   소멸을 지칭했다. 이에 반해서 벨팅과 단토의 경우 그것은 예술일반, 더 정확히 말해서 예술창작 활동의 정지, 예술작품의 소멸, 예술에 관한 역사적 및 그 밖의 담론의 죽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종말이라는 개념은 어떤 사물들의 의미, 평가 및 역사를 설명하는 데 암묵적으로 전제된 예술에 대한 개념 규정의 인식론적 부적절성, 오류, 무효를 지칭하는 말일 뿐이다.

 

지금까지의 예술 개념의 문제점 : 단토는 예술시대(Era of Art)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세계의 예술을 통시적으로 가령 라스코 동굴의 들소 그림으로 대표되는 원시시대에서부터 르네상스의 중반에 해당되는 13세기까지의 작품을 예술시대 이전의 예술 20세기 초 마네의 그림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중반 1964년 워홀의 작품이 뉴욕의 한 화랑에서 전시될 때까지 지속된 모더니즘운동 기간의 작품을 예술시대의 예술, 그리고 워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폭발적으로 생산된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예술시대 이후의 예술로 각기 3등분 한다.

 

이 세 시기의 특징은 예술의 개념에 대한 존재 여부와 관련해서 첫 번째 시기는 예술이 자신을 다른 사물과 구별하는 근거로서의 예술의 개념   본질에 대한 의식이 부재하였던 역사 이전에 존재했다는 점에서, 두 번째 시기는 바로 그러한 의식이 깨어나서 예술이 자신의 본질   정체성을 찾는 데 쏟은 노력의 시기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세 번째 시기는 예술이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찾아내어 그것에 맞추어 작품을 생산하고자 했던 규범으로서의 본질   정체성의 역사적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이른바 다원적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각각 다르다.

 

이와 같이 볼 때 예술시대의 담론 분석과 비판을 통해서 단토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예술 역사상 처음으로 지금까지 존재해 온 것만이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든 예술작품에 일관적으로 적용되어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예술 본질의 발견, 예술 개념의 정의를 제안한 데 있었다.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단토의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은 철학적 차원에서 예술의 본질을 찾아내고 그것의 개념을 분명히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예술 시대에서 지오르지오 바자리(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평론가)와 클레멘트 그린버그(모더니즘을 대변했던 평론가)가 했던 작업이 결국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올바르고 분명한 개념 규정에 있었던 것은, 그러한 본질의 발견과 개념 규정이 전제되지 않고는 예술사는 물론 예술에 대한 어떤 담론도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지금까지의 모든 예술 담론에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잘못된 본질   개념   정체성의 규정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렇다. 예술의 명확하고도 보편적인 개념 규정이 없이 어떻게 예술작품을 비   예술작품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으며, 그러한 구별이 전제되지 않고는 예술작품의 해석, 감상, 평가 그리고 역사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예술의 원형으로서의 공예

해체시대의 문명  문화와 공예의 개념 : 공예라는 제품과 예술작품을 비롯한 그 밖의 제품과의 구체적 경계는 무엇이며, 공예라는 개념과 예술이라는 개념 간의 논리적 차이는 어디서 어떻게 투명하고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는가? 도대체 플라톤이나 데카르트, 분석철학자나 현상학자가 추구했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공예의 정체성이 존재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최근의 시대정신에 비추어 볼 때 부정적이다. 절대적 인식, 따라서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보편적이고 무질서한 상대주의의 쓰나미가 닥쳐와, 과학적 이론과 기술이 잡아준 대로 각자 제자리를 질서정연하게 지키고 살아가던 과학기술 문명이라는 마을은 순식간에 쑥밭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견고하다고 믿었던 문명   문화의 마을이 근본적으로 해체Deconstruct되고 그곳은 혼돈과 혼동의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

 

모든 것이 자명하다고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모든 존재들 간의 경계가 분명치 않게 되었다. 상대성이론이 보여준 시간과 공간의 경계, 양자역학이 입증한 존재의 근원적 불확정성, 괴델의 수학적 명증성의 불충성 원리, 데리다Derrida의 철학적 해체 등으로 알 수 있듯이,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철학이 정밀한 논리에 천착하면 할수록 그러한 사실이 더욱 드러나고 있다. 동물과 인간, 식물과 동물, 생명과 물질, 마음과 몸, 노란색과 회색, 파란색과 붉은색, 이성과 감성, 종교와 철학, 과학과 철학, 철학과 문학, 예술과 비예술, 존재와 무, 인식과 존재의 구별과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이와 같은 개별적 존재들 간의 근원적이며 보편적인 경계선의 부재와 그로 인한 혼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별적인 존재의 정체성, 존재들 간의 경계선 등의 개념들을 재규정함으로써 세계를 재해석하는 데 있다. 문화의 한 산물인 공예의 존재론적 정체성, 개념적 재규정 및 다른 존재와의 경계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공예와 예술의 정체성 : 공예는 어떻게 정의되어 왔으며 그것의 존재론적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에 앞서 공예와 가장 유사한 개념인 예술의 개념을 살펴보자. 존재론적 혼동과 개념적 혼돈이 가장 뚜렷하게 도출된 문화적 산물은 미술품으로 분류된 제품이다. 그래서 이 미술품에서 드러난 혼동을 분석하면 공예의 개념을 재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예의 정의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콜링우드Collingwood는 예술의 개념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예술품을 지칭하는 낱말인 아트Art와 공예품을 지칭하는 낱말인 크라프트Craft라는 두 낱말의 어원적 의미에 주목한다. 크라프트와 아트는 어원적으로 다같이 어떤 물건을 만드는 기술Technique, 솜씨Skill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런 것을 만드는 과정은 사뭇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콜링우드에 의하면 그 기술   솜씨는 어떤 경우 이미 머릿속에 정해진 목적 달성 수단과 도구로서 제품제작에 적용될 수 있고, 어떤 경우 머릿속에 정해질 수 없는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인 오브제Object의 창조일 수 있다. 그는 공예와 예술의 경계선도 바로 위와 같은 식으로 분명하게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공예의 존재론적 특이성은 그것이 하이브리드Hybrid 즉 잡혼성이라는 점이다. 공예는 가시적인 도구의 기능적 속성과 심미(Aesthetic Experience)라는 비가시적인 내재적 가치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만든 제품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상의 실용적 도구라는 기능적 용도가 배제되고 오로지 심미적 가치만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전제된 순수예술의 정의와 달리, 제품의 순수성을 고집하지 않고 순수성과 유용성, 심미성과 도구성을 동시에 포섭하는 공예의 정의는 예술의 정의보다 훨씬 선명하고 쉽다.            

 

자기해체적 예술창조 과정

가능한 세계의 언어적 구성으로서의 예술작품 : 근대적 의미로 사용될 때, 예술이라는 개념은 미학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지적 영역인데 그것은 과학이라는 지적 탐구영역과 구별되는 동시에 실천적 영역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윤리학과도 차별화된다. 이 같은 미학적 탐구영역으로서 예술은 과학의 일차적 관심이 진리 발견에 있고, 윤리학이 선한 행위를 하는 데 반해서, 아름다움의 감상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 문화적 생산품을 지칭한다. 하지만 예술은 일반적으로 재현의 양식 혹은 표현 양식으로 규정되고 예술의 가치는 재현의 정확성과 우아함 또는 거기에 표현된 생각이나 감동의 깊이에 비례해서 감상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언어로서의 예술이 재현 혹은 어떤 감동의 표현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재현, 표현, 아름다움의 개념들은 그 외연外延이 너무 크다. 예술이 필연적으로 재현하거나 표현한다는 사실은, 문자언어이든 비문자 언어이든 예술작품이 일차적으로 일종의 언어로서 인정되어야 하고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언어적 명제로서 예술의 정의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이런 정의는 앞서 말한 예술의 존재론적 독립성 즉 자율성을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적 및 과학적 텍스트, 신호등, 그리고 인간이나 동물의 제스처가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재현하거나 혹은 어떤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한 명제를 예술작품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을 개연적 양상으로 봄을 의미하며, 똑같은 명제를 비예술작품으로 대한다는 것은 단언적 혹은 필연적 양상으로 대함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언어적 담론으로서의 예술작품과 철학, 과학, 종교 등과의 구별은 오로지 그것들 각각의 존재 양상 간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후자의 명제가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의 사실성을 주장하는 데 반해서 전자 즉 예술적 명제는 그러한 진리를 주장하지 않고 오로지 그러한 가능성만을 제안한다. 진리라는 개념은 제안이 아니라 주장에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니 만큼 예술작품 즉 예술적 명제의 진위를 따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술의 아카우스적 운명 : 예술적 충동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물의 궁극적 진리 즉 각기 사물들의 가장 구체적 상황 그대로의 모습으로 파악하려는 인지적 소망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언어의 재현 없이는 어떤 진리의 포착도 가능하지 않는 만큼, 언어 이전에 있는 사실 그대로 사물을 포착하려는 예술적 소망은 태양의 빛을 가지려는 이카루스의 소망처럼 말이 되지 않으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새롭고 독창적인 언어를 창조하려는 예술적 시도는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의 시도처럼 부질없다.

 

이카루스가 태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날개가 녹아서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예술가가 자신의 표상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표상 활동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어적 명제로서 예술작품은 그것이 자신의 것을 포함한 기존의 언어에 대한 비평의 표시이며, 끝없는 언어적 개성을 위한 창조적 활동에서만 비로소 예술작품으로 취급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예술은 본성상 자체 해체적 즉 파괴적이며, 영원한 자체 해체적 과정을 통해서만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뜻으로 아방가르드라고 불리는 특정한 예술운동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필연적으로 아방가르드이다. 예술은 영원한 혁명의 양식 말고는 달리 존재할 수 없다. 혁명적이 아닌 예술작품이란 개념은 근본적으로 자가당착적이다.

 

결론 : 새로운 문명의 구조적 모델로서의 예술 : 서양에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세계를 지배해 온 근대 서구의 과학기술 문명의 몰락 가능성은 생활환경의 약화, 생태계 파괴, 그리고 끊임없이 깊어지는 사회적 및 도덕적 악몽 등에 의해서 날로 더 자명해졌다. 이런 부정적 현상들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정보기술과 생명공학에 의해서 더욱 가속화하고 있는 중이다.

 

이 같은 위기의 원천이 다른 것도 아닌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서구 문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세계에 관한 재개념화, 즉 급진적으로 색다른 철학적 재구성 없이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명사적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세계예술사 전체를 통해서, 특히 현재의 서양예술사를 통해서 드러난 예술의 자기 해체적 특징은 시효를 다해 가는 문명의 석양이 아니라 새로운 먼동을 향하는 징조로 풀이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내재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예술의 자기 갱신적 특징이야말로 세계를 새로 조직하기 위한 최선의 패러다임이며 우리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데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2. 생태

 

생태 위기와 아시아의 사상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인 인간 중심주의 세계관 : 현재 인류가 겪는 생태 위기는 빠른 속도로 발달해온 과학기술 지식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위기를 주로 과학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어떤 사람은 현대의 과학기술과 지식이 서구의 산물이기에, 서구에 오늘날의 환경과 생태 위기의 책임이 있다고도 비난한다. 그런데 서구와 그 외 지역, 특히 동양을 구별하는 기준에는 태도의 차이가 있다. 이런 태도의 차이는 서구의 근대적 합리성과 동양의 미학적 감수성 사이의 차이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서구의 합리성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탈근대의 시기에 과학, 근대성, 합리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서구는 악의 대변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추론 방식이 바로 대부분의 아시아 학자들이 보는 방식이다.

 

현재 인류가 처한 위기와 그 위기의 원인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사유는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오류는 과학기술과 지식이 가진 본성을 잘못 해석한 데서 기인한다. 과학 지식이 합리적인 성격을 띠는 한, 그것이 복잡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도 아니고 그런 지식에 바탕을 둔 기술도 실제 인구 폭발이나 환경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 무분별한 산업화의 원인 제공자가 아니다. 그러나 과학기술, 근대성, 서구 사회 그 어떤 것도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특정한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라고 본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중심주의가 공간적   존재론적 위상의 중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가치론적 차원까지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가치론적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 종만이 가장 가치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즉 이 우주에서 인간만이 가장 가치 존재라고 말하는 이런 태도가 유가적 경전에서 나타나긴 했지만 이 가치론적 인간 중심주의는 전형적인 동양적 사유인 힌두교, 불교 그리고 도교의 경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개념이다.

 

자연 중심의 아시아적 세계관 : 이런 맥락에서 아시아적 세계관은 현재 목전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는 데 사상적으로 귀한 자원이 될 수 있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여기서 전통적인 아시아적 세계관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그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는 있지만, 대략적으로 중국과 인도의 사유를 총칭한다. 인도의 토양에서 자란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중국의 토양에서 태어난 유교와 도교의 세계관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주의적인 데다 나아가 자연에 적대적인 서구 세계관과 달리 자연-생태 중심인 사유체계라고 할 수 있다.

 

결론 : 선택과 행동의 몫은 우리 자신 : 오늘날 인류가 겪는 환경과 생태 위기는 아시아나 서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구촌 차원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이 위기는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모든 차이를 초월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서구의 사유와 아시아적 사유 중 어떤 것이 더 우월한가를 겨루는 문제가 아니고, 과학 문화와 명상 문화 그리고 친환경적 이데올로기와 인간 중심적 이데올로기의 우월성을 가르는 문제도 아니다. 반대로 문명의 위기인 환경과 생태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인류가 앞으로 이 지구상에서 계속해서 생존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자신 외에 그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지구촌에서의 고통과 공생을 위한 인문학

물리적 접촉과 정신적 고통 : 과학지식과 기술의 기하급수적 축적과 역사 전개과정의 단계에서 인간 집단의 단위가 가족에서 부락으로, 도시로, 국가로, 다시 인종적으로, 언어적으로 분산되는 동시에 마침내는 단 하나의 인류공동체로서의 지구촌에 통합되어 왔다. 그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현실에서 인류는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살면서도 그와 동시에 타자와의 갈등, 분쟁, 불안, 폭력, 소외 그리고 고독 등을 겪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이 속한 집단 안에서 다른 구성원과의 순조로운 접촉과 소통을 통한 합의를 도출해야 함을 전제하는데 진정한 합의는 당사자들 간의 마음의 소통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공유하는 가치와 언어를 찾고 개발해야 한다.

 

매체의 기술적 접촉과 마음의 인문적 소통 : 과학의 인식 양식이 그 인식 대상을 양적 차원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데 있다면, 인문학의 인식 양식은 필연적으로 주관적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인문학은 인간의 정신적 생활에 관한 반성적 정보와 인간의 주관적 표현으로서 인간심리학, 미술, 조각,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양식, 문학작품, 패션 등의 총체적 인간 사회의 정서적 표현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들은 한 사회의 지역적, 역사적 환경과 시대에 따라 언제나 가변적인 생활양식, 전통, 풍습의 축적된 총체 즉 문화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문학은 그러한 것들의 인간적, 정신적, 역사적 의미에 관한 주관적 서술방식이기도 하다.

 

인문학은 남녀, 정당, 세대, 민족, 남북, 동아시아 국가, 인종, 동서양, 전통, 언어 등 여러 영역과 문명권간에 존재하는 문화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밝혀내서 서로가 이질적으로 느꼈던 다른 집단의 마음  정서를 그들의 자연, 역사, 사상사, 예술사, 종교적 전통, 문학적 작품 등을 연구하고 그것들의 문화적 의미를 해석하며, 거기서 발견되는 고유성   특수성과 아울러 동일성/보편성을 동시에 인정하고 그것의 문화적, 인간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찾아내는 정신적 창조활동이다. 인문학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에 관한 모든 사유, 활동, 문화적 제품의 총칭이다. 

 

결론 : 소통을 위한 인문학적 구체적 실천 방법 : 소통이 남과의 접촉을 통해 그의 마음과 그가 사는 집단의 문화적 이해를 전제하고, 그러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타자와의 소통과 이해, 공존과 공영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공동체 방문, 그들 나라의 여행, 역사, 사상사, 문학 및 예술 등 다양한 문화적 제품들을 연구하고 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종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이질적일 수 있지만,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인류 집단 안의 동등한 구성원이며 근원적으로는 모든 차이를 초월해서인류라는 이름의 DNA를 공유하고 그에 적합한 가치를 추구하는 신비스럽고도 놀라운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예술적 변용

환경 미학의 모델로서의 예술 작품 : 환경 미학이 근래 미학의 영역에서 중심적인 화제의 하나로서 학문의 마당에 나타났다. 환경 미학에 대한 관심은 두 가지 이유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자꾸만 추해지는 우리의 주거 환경에 대한 자각과, 둘째는 자연과 인종의 생존을 위협하는 생태학적 재난의 개연성이라는 요소다. 그렇다면 환경 미학의 문제는 아름답다는 막연한 뜻으로서 어떻게 우리의 삶의 환경을 미학적으로 만족스럽게 만드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 전반에 걸쳐서 진행되고 있는 생태학적 재앙의 가능성과 어떻게 대처하고 그것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문제 해결의 우선적인 목적은 실천적 목적을 정하고 정당화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데 있다.

 

여기서 환경 미학의 이론적 틀을 단토 식의 표현을 적용하자면, 세계의 예술적 변용을 통해서 실천에 옮겨질 수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의 예술적 변용이라는 말은 예술작품이 이론적 관점으로서의 세계관과 환경 미학의 실천적 프로젝트의 모델   패러다임의 역할을 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경 미학 프로젝트의 철학적, 실천적인 몇 가지 함축적 의미를 유추해서 지금까지 갖고 있던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가치론적 세계관을 혁명적으로 개혁하고 인간의 다양한 과제들 간의 관계를 재조직할 필요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으로 변용된 세계 : 예술작품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지만, 분류적 관점에서 볼 때 언어적 의미와 평가적 가치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갖는다. 예술작품이란 말의 의미는 아주 넓은 뜻으로 규정된 일종의 언어로 정의되며, 그것은 그 자체로서 감상의 대상이 되는 내재적 가치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한편으로 뒤샹의 작품 <샘물>이 지각적으로는 다른 모든 변기들과 구별되지 않지만, 개념 예술가들에 의해서 예술작품으로 취급되어 그렇지 못한 다른 사물이나 사건이나 풍경과 구별되는 예술작품으로 변용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예술작품으로서 그것들이 자연적인 것이라면, 뒤샹의 변기와 그 이외의 변기, 또는 개념 예술가들이 예술작품이라고 부르는 사물, 사건, 풍경들과 다른 일반 사람들의 존재론적 차이를 구성하는 것은 비자연적인 동시에 비지각적 속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은 지성으로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감각을 통해서 감상할 수 있는 언어라는 존재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인지적인 동시에 미학적인 것이다. 원래적으로 하나하나의 모든 예술작품은 인지적인 동시에 미학적으로도 만족스러운 것이 되고자 하며, 위의 두 가지 관점에서 동시에 감상적이 되고자 한다. 만일 진리, 지식, 깨달음 등이 의미론적 기능을 하는 존재로서 예술작품의 인지적 가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언어적 매체로서 예술작품의 미학적 가치 평가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범주 규범들은 조화, 우아함, 우월성 등과 같은 속성들 일 것이다.

 

자연을 예술작품으로 본다는 것은 인간 중심적 목적으로 그것에 상처를 주어 해로운 행위를 하는 것일 수 있고, 그것을 보기 흉하게 만들거나 생태학적 관점에서 반자연적일 수 있으며, 기계적 법칙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착취할 수 있는 단순히 거대한 물질적 대상으로 다룰 수 없게 된다. 오히려 세계는 조화롭게 통일된 실체로서 그 아름다움이 찬양되고 감상되며, 찬양할 수 없이 깊은 우주적   형이상학적 의미가 존중되고 숭배되어야 하는 실체로 나타난다. 예술작품으로 변용된 세계는 인간과 자연, 행위자와 행위 대상자, 유기물과 무기물들은 다같이 어떤 것으로도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로 융합된다.

 

환경 미학에 함축된 철학적  실천적인 것들 : 여기서는 세계의 예술적 변용으로서 기획된 환경 미학 프로젝트 실천의 논리적 결과를 생각해 보자. 환경 미학자들이 세계관의 교체를 통해서 세계를 예술작품으로 변용했을 경우에도 그들은 그렇게 이루어진 예술작품에 더 손질을 해야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환경 미학자는 마치 한편의 시가 완전한 이상적 작품이 되도록 계속해서 손질할 필요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환경의 차원에서 보다 이상적인 예술작품으로 만들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환경 미학의 철학적 토대에 관한 여러 가지 고찰은 우리를 예술적   생태적이라고 이름 붙인 세계관으로 유도한다. 이러한 세계관의 틀 안에서 우리 인간은 세계 예술작품의 구성적 요소인 동시에 그러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이며, 또한 우리를 포함하는 세계는 이미 창조된 예술작품의 일부인 동시에 창조되는 과정에 있는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안에서 만일 환경 미학의 과제에 끝이 있다면 그 끝은 헤겔식 형이상학적 오디세우스적 역정의 끝과 일치할 것이다.        

  
 

Posted by archita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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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린 ‘소통’ 아닌 ‘소탕’을 해왔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다. 이념적으로 오른쪽이건 왼쪽이건 다른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면 그게 감옥이다. 이념이 아니라도 타인에 대한 편견과 자기 콤플렉스가 우리를 옭아맨다. 자유로운 발상과 창조적 행동이 함께 갇힌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좌파 지식인인 신영복(70) 성공회대 석좌교수. 마흔일곱 살이 되기까지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출소 후 줄곧 “소통과 변화를 가로막는 감옥에서 탈옥하라”는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j의 객원기자인 영화배우 이혜영(전 SBS 앵커)씨가 지난달 31일 신 교수를 만났다.

서울 필동 한국의집 문향루에서 마주 앉은 신영복 교수와 이혜영 객원기자. 이 기자는 부친 고(故) 이만희 감독이 만든 영화 DVD를, 신 교수는 자신이 쓴 책을 서로에게 선물했다. 노래를 끈질기게 청한 이 기자와 별 수 없이 두 곡이나 부른 신 교수가 활짝 웃고 있다.


● 통일혁명당 사건이 뭐예요?

 (신 교수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될 당시 그는 스물일곱 살의 육군 중위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경제학원론’을 가르치고 있었다.)

 “제가 구속된 1968년은 김신조 사건이 나고,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서 나포되고, 예비군 동원법이 만들어지고, 3선 개헌이 추진되고,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해예요. 이런 시기에 간첩단 사건이 터졌는데, 거기에 청년학생운동이 동일 사건으로 엮인 거죠. 그 접점에 제가 있었고요.”

● 감옥 시절을 ‘대학 시절’로 표현하시더군요.

 “제가 원래는 무기형을 받았기 때문에 만기출소를 기다릴 순 없는 처지였죠. 그래서 하루하루 깨닫고 배우는 게 있어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원래 교사 아들로 학교 사택에서 태어나서 (감옥 가기 전까지) 줄곧 학교에만 있었어요. 그래서 감옥 역시 각성이나 변화의 계기가 되는 학교로 받아들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 그래도 잃은 것이 있을 텐데요.

 “많이 잃었죠. 영어 단어도 많이 잊어먹고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도 잃고…. 잃은 게 참 많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깨달은 것도 많으니… 뭐 그런 게 인생 아니겠어요.”

●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시네요. 그런데 (오랫동안 수감됐는데) 언제 사랑할 시간이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혼하셨더라고요.

 “출소 후에.”(웃음)

● 2008년인가, 우주인 고산씨 주례 서셨지요?

 “네, 그런데 주례로서는 제가 좀 적절하지 않다고 봐요. 신랑·신부들은 제가 쓴 책도 읽고 해서 좋아하는데 가족들은 ‘감옥에 있던 사람을 왜 주례로 모셨어?’ 그러거든요. 고산씨 경우는 양가 부모님이 좋다고 하셔서….”

● 강연 요청을 자주 거절하시는 이유도 그런 건가요?

 “그래요. 보수적인 단체 같은 곳에서는 제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조금 불편할 수 있거든요. 젊은 학생들은 몰라도 산전수전 다 겪고 사회적 이해관계가 형성돼 있는 상태에서는 논쟁이 논쟁으로만 끝나고 별 성과가 없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 그래도 교수님을 서민의 술로 접할 수 있으니까요, 뭐. ‘처음처럼’이 선생님 글씨 맞죠?

 “제가 있는 성공회대에서 제 글씨와 그림으로 달력을 만들어요. ‘처음처럼’도 그런 달력 중 하나에 실려 있었어요. 96년에 주류회사에서 달력을 보고선 제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제 글씨가 상업적 용도로 쓰이는 게 별로 좋지 않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제 글씨는, 서민들이 쓰는 ‘민체(民體)’거든요. 가장 서민적인 술의 이름으로 가는 것이 민체의 팔자라고 생각했습니다.”

● 약주는 많이 하세요?

 “오랜 기간 (술을) 트레이닝할 기회가 없어 잘 먹진 못합니다. 그러나 무슨 술이든, 한두 잔은 따라갑니다.”

● 교육감이나 정치에 대한 생각은 없으신가요?

 (지난해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진보계열에서 그를 서울시교육감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신 교수는 고사했다.)

 “제가 교육계에 있긴 하지만 교육감은 젊은 사람이 해야 해요. 교육은 10년, 20년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젊은 분들이 장기 프로젝트로 열심히 하는 게 옳아요.”

● ‘변방의식’이란 어떤 것이죠.

 (신 교수는 최근 나온 서울대 강연집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에서 ‘변화하기 위해서는 변방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개인이든 사회든 부단히 변화해야 됩니다. 그런데, 중심부는 변화할 의지가 없어요. 반드시 변방이 변화의 중심이 돼요. 역사적으로 보면 문명의 중심도 계속 변방으로 옮겨오잖아요. 그 이유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해요. 변방이되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하는 거죠.”

● 교수님은 중심부 콤플렉스가 없으세요?

 “제 위치는 우리 사회의 중심부는 분명 아니고요. 저는 지식인은 중심부에 서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비판적 관점에서 대안담론, 비판담론을 만들어 내는 게 지식인의 임무죠. 제게 콤플렉스가 비교적 적은 이유는 변방과 마이너리티(minority)의 위치가 지식인으로서 저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 그런 콤플렉스가 우리 사회의 소통을 막는 장애물일까요.

 “진정한 소통이란 ‘너는 그렇게 생각해라. 나는 이렇게 생각하겠다. 그냥 공존하자’가 아니에요. 차이나 다양성을 내가 변화할 수 있는 ‘반가운 만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근대의 패러다임은 개인·기업·국가 모두 자기 존재를 강화하는 것이었죠. 게다가 우리는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했어요. 60대 이상의 세대로선 ‘소통’이 아니라 ‘소탕’을 해온 거죠. 그들에게 공존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잖아요. 이런 문화가 우리 사회 일각에 아직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어요. 또 보수 구조가 아주 완고하기 때문에 좌우의 바람직한 균형, 대칭적 균형이 안 되는 것 같아요.”

● 진보 쪽에서도 자신과 관점이 다른 사람과는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 것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후배 중 일부는 저더러 ‘왜 중앙일보하고 (인터뷰) 하느냐, 한겨레하고 해야지’ 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한겨레 독자들은 선생님 글 안 읽어도 돼. 중앙일보 독자들하고 만나는 게 필요하다’고 해요. 제도권 언론 중에선 중앙일보가 가능성 있는 신문이니까…. 나는 그런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자기 보신을 한다거나, 자기 이미지 관리 때문에 좁은 범위에서 행동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 천안함, 연평도 사건 이후 진보계의 대응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요.

 “사건 자체에서부터 출발하는 사고보다는, 우리 사회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재규정하는 관점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민족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두 개의 기본적인 축이 있다고 봐요. 하나는 개방성이고, 하나는 자기주체성이었죠. 역사적 구조에서 보면, 남북관계란 것은 단지 이념적 분단이라기보다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두 개의 축이 밖으로 드러난 측면이 있어요. 최근의 남북관계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굉장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던 면이 있어요. 그러한 과정에서 천안함 또는 연평도 사건이 돌출된 면이 있습니다.”

● 통일은 언제쯤 될까요?

 “저는 무리한 통일에는 반대합니다. 통일할 수 있는 역량도 아직 갖춰지지 않았고요. 저는 ‘통일’을 한자로 쓸 때, 거느릴 통(統) 자를 쓰지 않고, 소통할 통(通)자를 쓰기도 합니다.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평화를 정착하는 기간을 그냥 계속 끌고 가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시점에,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시기에 적절한 형태의 통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합니다.”

● 성공회대 교수님이라고 했더니 신부님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종교는 없으시죠?

 “예, 없습니다. 하지만 ‘도구로서의 신’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톨릭 신자인 친구가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는데 그분이 ‘참,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나, 하느님이 원망스럽다’ 이런 얘길 했대요. 그러면서 그 친구는 ‘우리가 누군가 원망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해요. 하지만 저는 원망 안 해요. 제가 독방에 있을 때 ‘왜 다른 사람은 자살도 하는데 나는 무기징역이면서 이 추운 독방에 앉아 자살하지 않고 앉아 있나’ 그런 고민을 심각히 한 적이 있어요. 추운 겨울에 독방에 있으면 신문 펼친 정도 크기의 햇볕을 두 시간가량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던 경험이 있어요. 인생이란 20년의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2시간의 햇볕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했습니다. 나는 정말 그 어느 것도 원망하지 않아요.”

● 그 햇볕에서 ‘햇볕정책’이 나온 건가요?

 “글쎄요. 그런데 바람이 못 벗기는 옷을 햇볕이란 수단으로 벗긴다는, 그런 전략적 개념이라기보다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랑, 굶주리는 북녘 동포나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이 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교수님을 해탈한 부처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이미지가 부담스럽진 않으세요?

 “부담스럽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교도소에서 검열을 예상하고, 또 가족들이 읽을 글이기 때문에 엄격한 자기 검열을 하고 정제된 글을 썼었잖아요. 그 글을 읽은 독자들은 또 그런 글을 저한테 요구해요. 그래서 지금 감옥에서 나와서도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요. 가능하면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 안 만나고 싶고…. 왜냐하면 또 빳빳하게 서 있어야 하고, 뭐 허술한 이야기나 싱거운 농담도 못하고 불편하니까….” 

1968~1988 감옥의 추억

“교도소 축구서 공격 맡았죠 … 이기면 버터를 얻었거든요”




신 교수는 의 j요청에 1면 제호와 ‘함께 여는 새날’이라는 글귀를 흔쾌히 써줬다.

● 붓글씨로도 유명하신데, 언제 공부하신 거예요.

 “어려서 할아버지 사랑방에서부터 죽 서예를 익혔고, 또 교도소에 있을 때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죠. 좋은 선생님도 만났고요.”

● 좋은 선생님은 거기에 어떻게 들어오셨죠.

 “저 있던 교도소에 소장이 새로 부임하셨어요. 이분이 대전지역에 굉장한 명필(名筆)이 한 분 계시다는 것을 아셨어요. 당시 우리나라에 생존한 분 중에는 유일하게 중국 고궁박물관에 글씨가 들어간 분이셨어요. 신임 소장이 그분 글씨를 하나 받을 욕심으로 교도소 서도반(書道班)에 그분을 모셔왔어요. 교도소에 불교반·가톨릭반·서도반 이런 게 있었는데, 말하자면 서도반을 판 것이죠. 그래서 그분이 교도소에 오셔서 제 글씨를 보시게 됐어요. 교도소장에게 저에 대한 얘기를 들으시곤 ‘이 사람이 지금 귀양 와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셨대요. 그러더니 매주 하루씩을 오셔서 글씨를 가르쳐 주셨어요. 아마 한 달쯤 오시고 나서 소장이 글씨 한 장을 얻지 않았나 생각돼요. 더 이상 안 오셔도 될 텐데, 이 선생님이 계속 오셨어요. 7년 동안이나요. 고(故) 정향(靜香) 조병호(1914~2005) 선생이셨죠.”

 신 교수는 그의 글씨체를 감옥에서 완성했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도 이 글씨체로 썼다. 그래서 그 글씨체를 ‘옥중서신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 편지들을 모은 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이라는 책이다.

● 나중에 책을 내실 생각으로 편지를 쓰셨나요.

 “그 글에는 고민이나 원망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도소 당국의 검열을 통과해야 하는 편지니까요. 그 책만 보면 ‘아주 반듯하게 감옥살이를 했구나.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는 독자가 많죠. 사실은 괴로운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편지는 당시 유일하게 집필이 허용된 공간이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쓸 수 있었죠. 제가 감옥이라는, 판이한 공간에 던져졌을 때 느끼는 충격이 많았어요. ‘그걸 그냥 두면 그냥 물처럼 흘러가서 다 잊어버리겠구나, 이걸 어딘가 기록해 두면 언젠가 다시 내가 생환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한 달간 내가 고민하고 생각했던 걸 다 정리해 썼던 것이죠.”

● 당시 재소자들과의 관계는 어떠셨나요.

 “교도소에서 한동안 제가 ‘왕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제게 약간의 거리감을 두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교도소 안에서 우리가 일하는 공장과 다른 재소자들이 일하는 공장의 축구 대표팀이 시합을 했는데 이겨서 상으로 버터를 타왔어요. 그 버터를 저녁 국통에 집어넣으면서 선수 하나가 연설을 해요. ‘이 버터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공장 축구선수들이 피나는 접전 끝에 몇 대 몇으로 이기고 따온 버터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막 박수를 쳐요. 그래서 ‘내가 축구선수를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교도소는 운동장이 작아 축구선수가 11명이 아니고 7명이에요. 한 공장에 100명쯤 되는데, 그중에서 7명이면…. 교도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 운동을 잘해요. 싸움도 잘하고. 그런데 그 일곱 명에 제가 들어갔어요. 그러고 그 공격 선봉을 제가 맡아서…. 제가 성공회대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도 교수 축구팀을 했죠.”

● 감옥에서 부르셨다는 18번 레퍼토리 ‘시냇물’을 들어봐도 돼요?

 “18번요?”
 “그게… 안 불러도 돼요. 가사만 전달하면 돼요. 원래 곡이란 것은 가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니까.”

● 그러니까 어떻게 전달하셨는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신 교수는 애창곡을 뽑고야 말았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그러고 내친김에, 그가 감옥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다는 영화 ‘부베의 연인’ 주제가도 부르고야 말았다.

● 노래방 같은 데도 가세요?

“서화 전시회 끝나고 한번 갔었는데, 참 좋더라고요. ‘아, 내가 공부할 노래도 참 많구나’하고 느껴서 ‘시내 나왔다가 한두 시간 빌 때에 혼자 가서 연습해야지’했는데 이건 쑥스러워서….”


신영복 교수


1941년 경남 의령 출생
1959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
1968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88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 성공회대 경제학과 강사
1998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06년 정년 퇴임. 현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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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그 이름 석자만으로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분이다.

고등학교시절, 『TV,책을 말하다』를 통해 접하게 된 후 어이없이 읽어버렸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동을 넘어 얼얼한 충격을 던져주었으며, 두고두고 마음에 간직하고픈 또 하나의 동경이 되어버렸다.
감옥이라는 물리적으로 한계와 철저하게 정제된 글 속에서 마저 그의 사색은 자유로움이 되어 춤을 추고 있었다.

이시대의 좌파지성이란 평은 잘 모르겠다. 
MC 김제동의 말처럼 "무대에 서서 좌측을 조금 더 많이 바라보고 진행을 하니까 좌파라고 하면 좌파지요,"라는 말처럼
개인의 사고와 생각을 하나의 색으로 물들여 버리고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정치놀음에 익숙해진게 아닐런지.

소탈한 그의 이야기와 그의 세월과 시간을 오롯이 담은 그의 글씨에서
엿보이는 그의 삶이 그저 좋고. 아름답다.
 
어쩌면 또하나의 작은 도전의 시작이 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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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感應)_정기용 건축
풍토 풍경과의 대화
Correspondence_Chung Guyon, An Architect

전시기간_2010.11.12~2011.1.30
참여작가_정기용
Participating Artist_ Chung Guyon

삶의 문화가 바뀌어가고 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여겼던 시절을 지나보내고, 상실한 많은 부분들의 소중함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전국 곳곳에 갖가지 이름의 길이 생겨나고 그 길을 마치 수행하듯 걷는 문화도 삶의 변화 중 하나이다. 땅에 발을 디디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기운을 ‘내’ 몸에 두는 것은 바로 ‘내’가 살아있고 또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이며 존재가치에 대한 확신이다.

늘상 발길이 바쁜 도심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차량 위주로 운행되던 대형도로는 육교가 없어지고 곳곳에 보행자 중심의 건널목들이 생겨나면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로움이 없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게끔 되었다. 무작정 차를 타고자 하는 마음도 거리의 변화된 모습을 느낄 수 있음에 양보하게 된다. 보이는 것도 많아지고 따라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나, 상대적으로 눈에 거슬리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진다. 사회와 ‘나’의 관계 맺기일 수도 있겠다.

걸으면서 만나는 조형물, 신호등, 휴지통 등등 거리에서 접하는 다양한 대상들, 이제까지 눈여기지 않았던 사물들의 디자인 또는 생김새들은 개인의 의지와 별개가 아닐 것이다. 이들이 공공디자인이며 공공조형물이다. 개인이든 단체이든 공공의 일원이며 공공성은 책임이자 권리이다. 생활 속의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문화가 되고 유산이 됨을 우리들은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건축물은 어떠한가.

눈앞의 경제논리에 급급했던 시절은 건물의 기능적 수행이 최우선 과제였으며 건축물은 건축주의 것일 뿐이라는 인식이 우선했다. 관공서는 민원인이 서류를 떼는 역할을 할 수만 있으면 되고 학교 교사는 학생을 단속할 수 있는 획일적 공간이면 충분했으며 기업의 사옥은 사무기능을 원활하게 돌릴 수 있으면 되었다. 예술교육공간이 독특한 디자인 개념을 담고 있으면 화제가 되었고 예술 공간이기 때문에 창의성이 가능하다고만 여겨졌다.

이것이 얼마나 큰 오류였는가. 공대교육건물이 성냥곽 세워둔 마냥 매력 없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 창의력은 예술가들만의 것이 아니라 공대생에게도 사회대생이나 경영대생에게도 필요조건이었으며 창의적 공간에서 학창시절을 지낼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가능했어야했다. 만일 그러했다면 지금의 우리 사회는 좀 더 풍요롭고 여유롭지 않았을까.

이제까지 지녔던 의문들과 막연한 생각들, 그리고 최근 최첨단 건축 재료들로 무작정 크기시위 하는듯한 지역시청이나 구청건물들을 보면 그냥 화가 났던 이유들이 터무니없지 않음을 건축가 정기용과 대화하면서 구체적으로 깨닫는다. ‘삶’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기용은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정기용의 건축물은 스토리텔러이다. 구석구석 숨겨진 이야기는 말을 건넬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교사 옥상위로 대형 창틀처럼 올라간 벽면은 하늘을 향한 거대 캔버스이다. 건물과 건물이 이어지는 사이로 ‘자연’이 친숙한 모습으로 들어와 있기도 하고 실내가 바깥이 되기도 하고 겉이 속이 되기도 한다. 내가 존재하듯이 건축물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며 나와 대화하고 소통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학교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청소년기를 보낸다면 문화적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회적 시스템의 부재가 무척 아쉽다.

건축가 정기용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문화관을 지니고 있기에 다른, 별난 건축물을 꿈꿀 수 있었을까. 그의 건축물을 읽으려면 그의 세계를 알아야 할 텐데, 쉽지 않다.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기용은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의 인생 스토리는 그의 건축물만큼이나 별난 세상살이의 연속이다. 그러기에 그의 설계도면에 끝없는 이야기와 상상이 담겨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년시절의 가족환경은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관찰하는 아웃사이더적인 자세, 즉 사물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성향을 형성시켰다. 외롭다고 여겼던 그 시절, 가극단 공연이나 영화상영이 이뤄지던 극장은 정기용에게 ‘위로’의 장소가 되었는데, 후에 그의 작업세계에서 ‘위로’의 의미는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

중학교 미술반, 수채화와의 만남, 그의 인생의 첫 스승과 둉료들, 자율적 커리큘럼, 도서관 등은 청소년기 정기용을 성장하게 한 키워드들이었다. 서울대 미대에서 수학하며 우리국토 답사여행, 문화유산, 프랑스문화, 실존주의, 역사 등에 대해 눈뜨고 자각하게 된다. 이어진 프랑스 유학시기는 문화적 쇼크와 문화적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시기였다. 철학자들의 논쟁풍경과 ‘축적된 역사’의 풍경을 접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올곧게 세우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그 자체로 요즘 말하는 통섭의 학문을 한 것이다. 그 곳에서 Interior Space를 공부하는 실내건축을 시작으로 건축, 그리고 도시계획을 공부하며 건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생긴다. 절망이 희망으로 넘어갔다고 그는 표현한다.

1986년 서울로 돌아온 후 정기용의 삶은 건축을 통한 교육, 건축의 사회적 역할, 건축의 공공성으로 전개된다. 건축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서울건축학교를 설립했고 여름워크샵을 개최해 왔으며, ‘건축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건미준)’을 결성하여 건축제도와 행정에 대한 개혁을 건의하고 있다. 건축물은 공동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유지할 수 있어야하고 그러한 건축물들의 집합으로 이뤄진 도시는 고유의 역사가 축적됨으로써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형성된다는 생각은 건축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공중목욕탕이나 천문대, 물레방아가 있는 면사무소, ‘위로’의 다락방이 있는 기적의 도서관, 노년의 가치를 존중해 주는 노인복지기관, 망자를 떠나보내며 살아있는 자의 현재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추모의 집, 세계와의 소통을 일깨워주는 학교와 기숙사…… 이들은 그가 학문으로 배웠던 지식을 삶의 형태로 전달하는 결과들이다. 그는 건축학도들에게 건축을 가르치는 건축교육자일 뿐 아니라 대중에게 ‘집’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지를 일깨워주는 생활교육자이기도 하다.

일민미술관은 정기용 전시를 마련하며 그의 건축물을 결과물로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건축가의 형성과정과 그의 건축관, 세계관을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일반 대중이 건축과 사회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기용은 말한다. 그는 건축가가 공학도나 설계자일 뿐 아니라 인문학, 철학, 사회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생각하는 지식인이자 삶의 전망을 다루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대중이 알아주길 바란다고. 그는 또한 건축은 부동산이 아니라 문화의 하나이며, 건축물은 사유재산이지만 공공성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대중이 이해해 주길 희망한다. 이것은 곧 일민미술관의 바램이기도 하다.


Correspondence_Chung Guyon, An Architect from cj park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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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어쩌나,
미국 들어가는 후배동생녀석 책 한권
선물한다는게 이런,
약간의 관심과 압도적 두께에 대한 동경 때문에
또 한권의 책을 질러버렸다.

솔직히 이 책은 읽어낼 자신이 없다.

뭐, 책장을 채운다는 소명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위로를 하며
빈 자리를 마련하고자
책장의 이곳저곳을 견주어 본다.

득템? 욕심?

에라, 찬양하라~그 두께의 진한 감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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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1학기 설계수업 때였다.

광장을 중심으로 한 도시설계과제는
도시설계라는 말에 어울릴말한 규모에 대한 기준과
광장의 형성과 역할, 필요조건 등에 대한 무지로 
갈피를 잡지 못해 적잖히 당황했었던 기억이 난다.

각 스튜디오를 담당하시던 교수님들의 의견도 다양했었고 
광장 이면에 존재하는 상업적 움직임들을 통한
광장의 유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러한 유럽의 광장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느끼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었다.
 
광장에 대해 관심이 생기게 된걸까?
진작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책을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되었다.

참 오랜만에 책을 본다.
미루기에 가장 1순위가 되었던
미안한 책들에게 면을 세우고 싶다.
시작. 언제 다 읽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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